옥천 대산리 출생 녹도만호
지역 대표인물 재조명 필요

▲ 임진왜란에서 용맹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정운장군을 기리는 신도비 제막식이 열렸다.
▲ 임진왜란에서 용맹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정운장군을 기리는 신도비 제막식이 열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충장공(忠壯公) 정운장군을 기리는 신도비 제막식이 지난 19일 옥천면 대산리 정운장군의 묘 일원에서 진행됐다.

충장공 정운장군의 본관은 하동이고 1543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창진(昌辰)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선조 3년(1570)에 28세로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금갑도수군권관, 거산도찰방, 웅천현감, 삭녕군수 등을 지냈는데, 강직하고 정의를 지킨 성격 때문에 제주판관 때 목사 와의 불화가 발생해 파직되었다가 1591년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부임한 것으로 전해진다.

녹도만호로 부임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서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1592년 9월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선봉에 서서 용맹히 싸우다가 몰운대에서 왜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운장군은 1604년에 병조참판, 1796년에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됐다. 1608년 선조의 특명으로 정려를 포상받았으며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해남군지에 따르면 충신각은 충절사에 향사된 정운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1608년 조정에서 명정을 내려 1681년 정각을 건립했고 1985년 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정운장군이 해남에서 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보는 미약해 지역 대표인물로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정운장군을 기리는 행사는 찾아볼 수 없고 울돌목에서 열리는 명량대첩축제에서도 정운장군에 대한 테마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 타 지자체에서는 정운장군의 충절과 업적을 꾸준히 기리고 있다. 부산에는 녹도만호 정운장군을 기리는 추모비 정운공순의비가 있으며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부산포해전 승리를 기념하고 정운장군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1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해 행사를 열고 있으며 매년 정운장군의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녹도진성이 설치되었던 고흥군에는 정운장군과 충렬공 이대원장군의 우국충정을 추모하는 쌍충제전을 개최하며 조선수군 행렬 재현 시가행진을 비롯해 추념사, 추모시 낭독, 헌화와 분향 등이 진행된다. 또한 해군은 정운장군의 충심을 기리고자 해군209급 잠수함 6번함을 정운함이라 명명한 바 있다.

이에 하동정씨 장령공파 감찰공후 충장공 문중(회장 정병진)은 정운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해남에 널리 알리기 위해 신도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지난 19일 하동정씨 장령공파 후손들은 신도비 제막식을 열어 정운장군의 충절을 되새기고 신도비 시비에 대한 해설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정병진 회장은 "정운장군이 이순신장군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웠고 타 지역에서는 이를 기리는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고향인 해남에서는 오히려 알아주는 이가 없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며 "신도비 제막식을 계기로 해남 군민들에게 정운장군을 알리는 역사적인 공간으로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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