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옥(해남공고 교사)

 
 

'동성애'는 변태의 일종으로 '사람 이하의 말종들이나 저지르는 것'이라 사회는 가르쳤고, 거기에 이의를 달 사람마저 전무하던 시절에 자랐던 우리들에게 동성애는 논의도 할 수 없는 주제였다.

많은 나라에서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하는 추세에도 우리사회는 성평등이란 단어마저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수년 전이지만 내가 동성애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으로 수긍하게 된 건 논쟁의 상대방이 나를 향해 던진 질문에서였다. "그래서 동성애자가 당신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는지" 말하라는 것이었다. 주장의 빈틈을 찾으려 아무리 생각을 짜내도 동성애자가 나에게 입힐 피해는 찾을 수 없었다. '그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해를 입히는가' 이것이 사회적 금지행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당신에게 피해 입히지 않는 문제는 그냥 두고 당신 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그는 말했다.

개인의 취향과 삶의 조건은 다양하고 저마다 천차만별이니 쉬이 어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만들어 가르치려 말라. 바람직의 기준은 더더욱 천차만별이니 강요하지 말라.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는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니 괜히 나서서 가르치려 말지어다. 그래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 동성애는 인정한다고 쳐도, 내 자식이 동성애자라면 그걸 인정할 수 있는가? 삶의 무게를 담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는 더 어려웠다. 거기엔 자식의 삶은 내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이는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평범한, 그러나 실천이 쉽지만은 않은 두터운 인식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 일이 버티고 있었다. 나는 동성애를 인정했고, 자식의 삶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덤으로 얻었다.

특별히 동성애자옹호운동을 하고 싶어서 이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서 금지하는 것의 기준은 그 일이 상대와 사회에 어떤 직접적인 피해를 발생시키는가의 여부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금지와 장려를 하는 행동의 기준은 '학생의 바람직한 성장'에 맞추어져 있다. 맞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는 행동에 대한 처벌보다 '학생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는(다소 주관적인) 어떤 항목이 더 엄하게 처벌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학생들에게 흡연은 중요한 금지사항의 목록에 있다. 위반시 벌점이 상당하다. 청소시간에 청소를 안하고 도망간 경우나, 교실에서 주먹을 휘두른 경우보다, 다른 학생들의 왕따와 차별에 은근히 참여하는 경우보다 많은 벌점을 메긴다.(이 말이 흡연을 장려하거나 금지시키지 말자는 주장 하는 걸로 오해말길…)

중벌을 메기는 기준이 학생의 앞날을 위해서라거나, 풍기문란을 가져온다거나, 나쁜 학생들 하고 어울리게 되니까 등의 추상적 기준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타인에게 직접적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는 일이 '소소하더라도 다른 이에게 구체적인 피해를 입히는 행위'보다 더 중하게 처벌하는 건 모순이다.

흡연이 학생에게 여러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 흡연학생을 처벌하는 교사의 다수도 금연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 이걸 지키라 할 순 있으나 중벌을 내리는 건 오버다. 중벌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제해결에도 도움을 줄 수 없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