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기(계곡향우)

 
 

내 고향 해남은 값진 여러 문화유적이 있습니다. 윤선도의 녹우당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문화유적과 대흥사, 미황사 등의 불교문화유적 그리고 땅끝으로 불리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형성된 유배지문화가 그것입니다.

이 문화유적들은 해남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 해남문화의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 고향 해남문화의 정체성은 엄마 젖가슴 같은 황토 일구고, 다시 그 땅에 묻히는 생의 주기를 수많은 세월 동안 반복해 오면서 형성 된 해남 사람들의 삶 속에 있습니다.

지방자치시대 이전, 임명된 관료들이 우슬재를 울면서 넘어온다고 합니다. 땅끝 해남은 중앙 관료들에게 너무나 먼 오지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기 마치고 우슬재를 넘어 돌아갈 땐 울면서 떠난다고 합니다. 해남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해남 사람들의 마음을 '물감자'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때 해남사람들은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 '물감자'라고 불렸습니다. '물감자' 해남을 폄하하는 의미로 쓰였음은 물론입니다. 어린 시절 '해남물감자'소리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인생 황혼기를 맞은 지금 돌아보니, 그 시절의 자신이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해남 땅에서 나온 재래고구마를 일명 물감자라고 합니다. 가마솥에 찐 다음 식으면, 물렁물렁합니다. 쭈욱 빨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 맛은 달고 부드럽습니다. 물감자로 이름 불린 이유입니다. 겨울밤 등잔불 아래 식구들 모여 앉아, 홍시처럼 한입 쭈욱 빨면 입 안 가득 찬 달콤한 물고구마, 가난한 보릿고개를 넘을 때 배를 채워준 물고구마. 기억은 아련하고, 추억은 생생합니다.

엄마 젖가슴 같은 땅을 닮아, 베푸는 사랑 한량없는 해남 사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평화로운 해남 사람, 촌스러움 속에 따뜻한 인정을 품고 있는 해남 사람. 물컹함 속에 달콤함을 품은 물고구마와 닮았습니다.

21세기 한 마을처럼 가까워진 지구촌 시대에 사람들의 생활은 더 풍요롭고, 더 편리해졌으나 마음은 공허하다고 합니다. 옛날보다 더 행복해진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삶은 불안하고, 갈등은 깊어지고, 분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좀 불편하고, 좀 가난했으나 정 나누며 살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고, 자연과 동업하며, 자연을 닮은 인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행복한 인류의 미래를 위한 답입니다. 바로 '해남물감자' 마음입니다. 행복한 삶을 되찾기 위해서 내 고향 해남 '물감자'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해남물감자' 오래된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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