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변호사)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봄을 기다릴 줄 안다"(김남주) 기다림의 끝, 땅끝은 봄이다.

언제부터 1월 1일이 한 해의 시작이었을까? 우리네 달력이 서양에 기원을 둔 것이라서 쉽게 기독교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새해의 시작이 1월 1일이 된 것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다.

역사적으로 BC 154년 로마 원로회 칙령에 기원을 둔다. 하지만 당시의 시공간개념은 지금과는 달랐기에 칙령이 지켜지기는 어려웠다. 각자 자기 편한 대로 한 해의 시작을 정해놓고 살았다. 어쩌면 한 해라는 개념조차도 빈곤했다.

기독교가 서양을 지배하게 되면서 기독교 기념일이 한 해의 시작이 되는 경우도 물론 많았다.

예를 들면, 독일 마인츠의 새해의 시작은 크리스마스였고, 쾰른 지방에서 한 해의 시작은 부활절이었다. 또한 독일의 트리오 지역에서는 수태고지일인 3월 25일이었다. 이렇게들 달랐다. 여러 시도 끝에 영국에서 새해의 시작을 1월 1일로 정한 것은 1753년. 이때부터 1월 1일이 새해라는 데에는 더 이상 이견이 없게 됐다. <알렉산더 데만트, '시간의 탄생'>

동양은 또 달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전통은 음력 1월 1일을 한 해의 시작이라 여겼다. 우리 민속신앙은 동짓날 다음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기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서양력의 기원에 따라 1월 1일이 한 해의 시작이 되었지만.

그렇다면 계절의 순서는 왜 봄·여름·가을·겨울일까? 1월 1일은 겨울인데, 그렇다면 겨울·봄·여름·가을의 순서가 아니라 왜 봄이 맨 먼저 오게 되었을까?

긴긴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는 너무도 당연했다. 한 해의 시작은 양력 1월 1일도, 음력 1월 1일도 아닌 봄이었다.

따뜻한 햇볕과 밭고랑 사이로 움트는 새싹들, 봄이야말로 계절의 시작이었고, 한 해의 시작이었다.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엄정한 순환성. 이것이 인류의 오랜 시간관이었던 것이다.

봄을 기다리던 소년이 있었다. 기나긴 겨울밤과 겨울 방학이 싫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남녘에 눈이라도 내리면 친구들은 뒷산 언덕으로 몰려들었다. 비닐 비료 포대에 볏짚을 쑤셔 넣고 그 위에 몸을 실으면 눈썰매였다. 어쩌다 무덤 위까지 올라가 눈썰매를 타기도 했고, 또 혼도 나곤 했다. 마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앞산 끄트머리에는 조그만 개울이 흘렀다.

냇물이 휘감아가는 곳에 자그마한 웅덩이가 있었고, 겨울이면 꽁꽁 얼었다. 얼음을 지치며 놀기엔 그만이었다. 얼음장 위에서 팽이를 치고 놀았다. 아버지의 술심부름으로 한밤중 마을 어귀에 나서면 겨울 달빛은 한없이 투명했다.

아무리 땅끝이라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새 학년을 기다렸고, 봄을 기다렸다. 봄 방학마저 끝나고 나면 소년의 한 해가 시작됐다. 새 책, 새 공책, 좀 더 의젓해야 할 새 학년의 시작이었다. 소년의 새해였다. 새로운 다짐으로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굳이 신작로를 놔두고 산길을 걸었다. 그리곤 마을을 가리고 있던 앞산 기슭을 돌아서면 저만치 집이 보였다.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때면 친구들과 누구나 할 것 없이 논두렁에 책가방을 던져두고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곤 했다. 얼음이 녹아 흘러내리는 봄물의 푸르름이 더없이 좋았다. 연두색 새싹들의 봄과 함께 소년의 사계절은 시작됐고, 소년에서 청년으로, 다시 장년으로….

그때의 소년은 어느새 가을을 살아가고 있다. 소년이 맞이했던 그때의 봄날에는 봄비도 따스했다. 푸르렀다. 봄비에 젖은 대지는 더 푸르렀고, 소년의 마음속의 푸르름은 짙어지곤 했다. 그때 소년의 마음을 해남의 시인 고정희가 노래했던 걸까.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솨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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