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옥(해남공고 교사)

 
 

작업을 거는 A와 작업을 당하는 B를 생각해보자. (이때 A와 B는 남자와 여자로, 혹은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다). B는 예스와 노의 신호를 분명하게 해주는 게 좋다. 예스라면 문제는 없다. 문제는 노의 경우다. 거부의 마음이 있음에도 미적대거나 우유부단하게 넘기며 노라고 말하지 않을 때 오해가 발생한다. B에게 '노'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의미에서 자신을 좋아해주는 A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도 '노'는 필요하고, 오해나 불필요한 엮임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현실적으로는 성추행이나 성희롱인가를 따질 경우 이 '노'가 있었는가가 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 '노'에 대한 필요성과 해석은 왜 그리 다른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당신은 아마도 성추행자 편일 가능성이 높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처럼 직장내에서 성추행이 일어나면 입을 다무는 남성들 대부분은 이런 일이 흔하고 술자리에서 놀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조용하게 넘어가는 게 좋다는 입장을 취한다. 같은 직장에서 이런 일을 제기하면 어색하고 불편해진다느니, 그냥 넘어가자느니, 어떤 이는 같이 놀았으면서 분위기 망치냐느니(같이 즐겼으면서, 혹시 꽃뱀 아니냐 까지) 하면서 말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가해자의 편이거나 방관자의 편에서 사건이 넘어가기만을 바라본다.

반면 피해 여성의 입장에서 이런 사건은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하거나 사직을 생각하기도 하고 많은 날을 울음으로 지새우기도 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큰 고통을 겪는 일이다. 남성들은 반문한다. 성추행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아무 말 않다가 나중에 제기하는 건 무어냐. 그때는 좋았다가 변한 거냐, 뭔가 이익을 바라며 그럴만한 나중 시점에야 상대의 약점으로 폭로하냐, 그게 꽃뱀 아니냐고 말한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여성들은 대개 그때 말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직장 내 주변 남성들 모두가 그런 정도는 있을 수 있다며 당연시하는 분위기, 심지어 여성 고참들까지 그냥 모른체 넘어가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면. 이 마당에 갓 들어온 신참 여성이 직장 내 질서와 분위기에 쨍강! 유리를 깨뜨리는 일을 벌이기는 쉽지 않고, 제기해봐야 입증도 어렵고 증언확보도 쉽지 않고 불이익 받을 가능성만 많다. 이런 구설수에 오르면 여성에게 불리할 소문만 나돌 것인데 누구라서 용기 있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남성의 배후에 무력(武力)의 가능성, 위계,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남자에겐 그런 정도쯤이야' 하는 남녀 차별적 문화가 우리사회엔 강력한 벽처럼 버티고 서 있다. 그래서 남성들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 몰이해의 바탕에서 '그 때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왜 인제야 그러느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사회 최고의 권력, 검사의 자리에서도 여성은 '노'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고 '노'라는 발언 이후 그는 많은 불이익을 받았다. 희생을 각오하고 그 문제를 사회에 밝히는데 8년의 세월이 걸렸다. 자식 앞에 부끄럽고 싶지 않은 엄마의 간절함으로야 또다시 용기를 냈다. 상식을 벗어난 추행을 벌이면서 '노'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노'라고 말하기 전부터 '노'의 기미만 보여도 그 '노'는 분명하게 '노'인 것이다.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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