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희(주부)

 
 

해가 바뀌면서, 우리가 흔히 하거나 듣거나 하는 덕담 중에 빠지지 않는 게 '건강'에 관한 것이다. 물론 개인의 건강을 소원하는 말이겠지만 조금 더 그 범위를 넓혀 건강한 가정 또는 건강한 사회에도 잘 어울리는 말이다.

작년 12월 말일에 영화 '1987'을 봤다. 보는 내내 마음이 먹먹해서 영화가 끝나고 바로 일어설 수 없어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1987년 바로 그때, 거기에 있었다. 요즘은 대중매체뿐만 아니라 사적인 밴드나 카톡에서도 자주 '1987'에 대해서 말한다. 영화 '1987'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에게 30년 전의 '나'를 소환하게 하는지, 친구가 밴드에 글을 올렸다. '동아리방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신나를 사러 페인트 가게를 전전하고…. 6·10항쟁과 직선제 쟁취!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 당선! 그 때 이후로 정치에 대한 관심과 열망을 접었지…. 참 오랜만에 그 시절의 나를 만나고 온 것 같아…'

군홧발로 권력을 강탈하고 광주에서 이미 피 맛을 본 군사독재정권은 폭력으로 국민의 입을 막고 생각을 조종하려고 했다. 또 많은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죽였다. 영화에서 어느 경관이 말한 것처럼, '너 하나쯤' 죽여서 버리는 것은 큰일도 아닌 세상이었다.

1986년 겨울 무렵부터 학교 대자보엔 누가 어디로 잡혀가서 고문을 당했다는 폭로가 자주 실렸다. 폭력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다. 게다가, 반민주, 반독재에 맞서 많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또한 항거했다. 추모 집회에선 어두운 죽음의 시대로 시작하는 노래 '친구'를 불렀다.

1987년 초,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고문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세상에 들어나면서 '종철이를 살려내라'로 시작한 가두시위는 전두환의 4·13 호헌 선언 후 '호헌 철폐, 독재타도' 투쟁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불심검문 때문에 집회에서 사용할 확성기를 옮기는 데도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이용해야 했던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자정 지나 새벽까지 명동, 을지로에서 시위를 했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함성과 구호가 난무하며 긴장감이 팽팽했던 그곳에 드디어 사과탄을 던지며 곤봉을 들고 사복경찰들이 들어오면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야 했다. 행여나 잡히면 무수한 발길질과 곤봉질, 차마 듣기 힘든 욕지거리에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개에게나 던져줘야 했기 때문이다.

구독 중인 신문의 2018년 1월 1일자 타이포그래피(Typo Graphy)한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대한만국 헌법 제 1조 1항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명조체와 가운데 정렬 방식으로 쓰고 '인간의 존엄은 침해되지 아니 한다'는 독일 헌법은 고딕체와 왼쪽 정렬 방식을 채택해서 표지 1면의 전체를 장식했다. 대한민국 헌법은 압도적이며 권위적으로 보인다. 국가 통치 체제의 근간이 인간의 존엄보다 국가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글꼴과 자리 배치로 표현했다.

1987년 직선제로 개헌한 대한민국 헌법이 30년 만에 개정이 논의되고 있는 이때, 개정의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더 이상 국가의 권위를 위해 국민이 천민(賤民) 되는 헌법이 아니기를, 권력자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어서는 아니 됨이 분명하고 선명하게 명시된 헌법이기를 바란다. 1987년과 2017년 두 번이나 성공시킨 혁명이 한밤의 꿈도 헛된 꿈도 되게 해선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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