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옥(해남공고 교사)

 
 

어린 시절 내가 구슬이나 딱지를 모아 숨겨놓은 곳은 뒤란에 쌓아둔 나뭇단 밑이었다. 남몰래 혼자 먹을거리를 해치운 곳도 뒤란의 어디쯤이었고, 처음 소꿉놀이를 시작했던 곳도, 낫이나 손칼로 팽이나 썰매를 만드느라 몰입했던 곳도 그 자리였다. 누군가에 쫓겨 몸을 숨겨야 할 때도, 나를 드러내지 않고 숨죽이며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정황을 파악할 때도 뒤란은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학교 갔다 와서 심심하면 아무 일 없어도 한 번 둘러보는 곳이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너무나 헤졌고 한겨울 내내 한 벌 뿐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울음이 솟아났다. 엄마한테 막무가내로 옷을 사내라고 대들며 울었다. 하지만 어린 생각에도 이게 말이 안된다고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혼자 오래 울었던 곳도 뒤란이었다.

아파트에 살면서 많은 것이 편리해졌다. 집안 단속도, 우편물 수취도, 해충방지도,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도 너무나 편리해졌다. 그런 아파트를 졸업하고 새집을 지을 때 내가 갖고 싶은 공간은 뒤란이었다. 집 설계를 마음껏 다양하게 해볼 것 같았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어림없는 일이었다.

한자, 한평의 공간이라도 실용과 실속에 맞게만 지어야 한다는 습관적 사고방식은 거실을 넓게 두고 거실과 연결시킨 부엌, 각자의 방과 화장실이 배치된 설계도 밖에는 상상해내지 못했다. 이 완강하게 고정된 설계를 벗어나기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새 집을 짓는 사람들도 뒤란은 불필요하고 어질러지거나 아깝게 땅만 잡아먹는 공간으로 여겨 없애버리거나 투명차양으로 꽉 덮어 실용적 공간만을 늘리기 일쑤다. 공간만 구분되었을 뿐 고요한 독립성, 은밀함의 거리가 없이 사는 현대다.

사생활이라는 말에는 자신만의 이익, 음침하고 병적인 특성, 이런 것이 숨겨진 어떤 것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자라면서 배운 최고의 사자성어, 늘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세월이었고 사생활의 중요성을 말하는 이는 드물었다. 공적인 역할을 맡은 이나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아무렇게나 까발려지면 그는 이중적인 사람이었다는 단죄가 씌워져 도덕적 치명상을 입는다.

사생활의 비유에 가장 적절한 말이 뒤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간섭받고 싶지 않은 개인만의 별 쓰잘데기 없는 생각, 놀이, 관심, 추억이 노는 곳, 가려졌으나 꽉 막히지는 않은 곳이다. 사람에겐 이 틈이 필요하다.

사생활 없이 인간은 존립할 수 없고 깊이 있는 무엇은 창조될 수 없다. 아무것에도 제한받지 않는 깊은 고요함 속에서 혼자 침잠하지 않고서 어떤 창조적인 예술이나 성과가 나올 수 있을까.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고 CCTV로 찍히는 세상은 보안이 잘 지켜지긴 하겠지만 사람이 숨 쉬고 살아야 할 이 틈을 없앤다. 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어떤 틀 속에서 정형화될 것이다. 가지치기한 나무처럼만 자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뒤란을 간직하고 산다. 그래야 한다.

가끔씩 해당 사건과 무관한 개인의 사생활을 문제 삼거나 들춰 공격하는 못된 신문의 행태를 본다. 그것은 문제에 대한 논점의 이탈이면서 개인의 사생활 침해다.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할 수 없는 이들이 쓰는 나쁜 암수다. 멈춰서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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