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의 비조 고산 윤선도
선비의 서정성과 고택 정서

▲ 해남은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을 배출한 문학 고장이다. 특히 고산 윤선도 유적지에는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비롯한 4600점의 유물과 고택 정서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녹우당.
▲ 해남은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을 배출한 문학 고장이다. 특히 고산 윤선도 유적지에는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비롯한 4600점의 유물과 고택 정서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녹우당.
▲ 고산 윤선도 유적지 윤선도 고택 앞 은행나무.
▲ 고산 윤선도 유적지 윤선도 고택 앞 은행나무.
▲ 유물 전시관.
▲ 유물 전시관.

해남군은 국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고산 윤선도부터 민족시인 김남주 시인 등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해온 문학 정신이 서린 지역이다.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는 해남윤씨로, 종가는 해남읍 연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윤선도 고택에 세거해온 종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해남윤씨 8개의 파 중에서도 어초은 윤효정이 시조인 어초은공파 문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산 윤선도는 윤효정의 4대손으로, 조선중기 대표적인 시조시인이자 조선조 시조문학을 마지막 장식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연의 모습을 우리말로 노래한 어부사시가와 오우가가 있다. 어부사시가는 고려 충목왕 이전에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조선 명종 때 농암 이현보가 개작했고 고산은 이를 참고해 우리말로 새로운 어부사시가 40수를 지었다.

오우가는 고산이 현산면 금쇄동에 은거할 무렵 지은 시조이다.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 다섯 가지를 벗으로 삼고 각각의 특징에 빗대어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선비의 서정성을 표현해내 선비 시조의 최고봉이자 산수 미학의 절정이라는 평을 받아 고산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고산의 정신에 큰 영향을 준 고택은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주택이자 전통고가이다. 윤선도 고택의 녹우당은 사랑채 건물인데,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사부였던 고산이 해남으로 내려가려 하자 수원에 집을 하사했는데, 효종이 죽자 사랑채를 뜯어 인천 제물포에서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것이다.

이연숙 문화관광해설사는 "녹우당은 고택 앞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이 흡사 비 오는 소리와 같다고 해 녹우당(綠雨堂), 즉 초록 비가 내리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녹우당은 기둥이 바깥쪽으로 길게 빠져 나온 이중 처마 형태인데 차양막의 효과를 살려 생활의 편리를 추구하는 실리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안채 지붕 위의 또 다른 작은 지붕인까치 지붕은 환기통 역할을 한다. 신분이 낮은 절집에서 발견되는 건축기법이어서 체면을 중시하는 사대부 고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살림에 편하다면 과감히 적용하는 실학적인 모습이 담겨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녹우당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14대손인 윤형식 씨가 살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문학 정신과 아름다운 고택의 정서, 실리학적인 가풍은 공재 윤두서와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된 유물들은 선조의 유물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해남윤씨 어초은파 종가가 전란 속에서도 지켜내 현재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수많은 문인 배출해온 해남

이외에도 해남 정씨와 결혼해 처가인 해남을 주 근거지로 삼은 금남 최부는 세계 3대 여행기로 손꼽히는 중국표류견문기 '표해록'을 지어 성종에게 바친 바 있다. 나주에서 태어나 해남 정씨와 결혼한 후 처가인 해남을 주 근거지로 살았던 최부는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의 금(錦)과 해남의 남(南)에서 한 글자씩 따와 호를 지었다고 알려진다.

또한 지난 1496년 해남읍 관동리에서 태어나 성산동 계산풍류의 시종으로 추앙을 받으며 호남시학에 족적을 남긴 석천 임억령, 시승(詩僧)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 다선일미 사상을 노래한 동다성과 다신전을 남긴 초의선사, 민족해방과 투쟁정신을 날카로운 시 구절에 담아낸 시인 김남주, 여성해방운동을 노래한 페미니스트 시인 고정희, 무소유의 철학을 알려오며 수많은 저서를 남긴 법정스님, 북일면 출신으로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한 현대시인 황지우 등 다양한 문인이 배출됐다.

 

▲ 김남주 생가.
▲ 김남주 생가.

암울했던 시대 저항정신 표출한 김남주

사랑과 혁명 노래한 민족시인

고 김남주 시인은 민족정신을 담아 권력과 자본을 통렬히 비판하고 자유와 통일, 사랑을 노래한 전사였다.

김남주 시인은 1945년 삼산면 봉학마을에서 김봉수·문일님 씨 부부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해남삼화국교,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입시위주 교육이 맞지 않아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그는 3선 개헌 반대투쟁, 교련반대 시위 등으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며 유인물 '함성'을 만들었다가 옥고를 치렀고 전남대에서 제적당한다.

출옥 후 해남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농촌현실을 노래한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

이후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교우하며 지난 1977년 해남농민회를 결성했고 광주에서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하는 등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반유신투쟁 지하조직 남민전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구속돼 징역 15년형을 받아 청춘 대부분을 옥중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우유곽에 글자를 눌러 옥중시를 써냈다. 그의 시 470여편의 중 300여 편이 옥중에서 쓴 시이며 80년대 한국 시의 절정을 이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는 '진혼가',  '조국은 하나다' 등이 있다.

 

▲ 고정희 생가 내부.
▲ 고정희 생가 내부.

여성 수난 노래한 여성해방전사 고정희

고행·묵상·청빈 좌우명 삼아

고 고정희 시인은 여성들의 수난과 투철한 여성해방의식을 담은 시를 힘차게 표출한 시인이다.

지난 1948년 삼산면 송정마을에서 고양동·김은녀 씨 부부의 5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성애이다. 형제가 많아 삼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정규교육과정을 거칠 수 없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남달라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고정희 시인은 밤을 세워 책을 읽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도 책을 읽었다고 한다.

고정희 시인은 지난 1970년 광주로 상경해 새전남과 주간전남의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다. 이 때 사회 속 여성들의 삶에 문제의식을 갖게 되고 시대상황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시를 쓰기 시작해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 등을 발표해 등단했다. 강인한 어조로 여성 해방의식을 담아냈으며 기독교적 세계관을 표현키도 했다.

또한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지냈고 여성문화운동그룹 '또 하나의 문화'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90년에는 '여성해방출사표' 시집을 냈다.

고행·묵상·청빈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고정희 시인은 '초혼제' 등 10권의 시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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