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웅(해남군장애인종합복지관장)

 
 

휴가보다도 길었던 추석연휴를 지내고 일상으로 복귀하니, 완연한 가을이다. 추석을 맞이하기 직전만 해도 볕이 따갑더니, 이제는 조석 뿐 아니라 낮에도 실내에 있으면 스산한 것이 가을임을 알겠다.

파랗고 높은 가을 하늘을 보니 괜히 맘이 설레어, 퇴근길에 부러 차창을 열고 가을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운전하니, 길가 쪽 야트막한 야산 군데군데 자리잡은 봉분들이 소담스럽다. 추석 뒤끝이라 그런지, 말끔히 벌초를 한 모양새가 곱고, 각자 생활의 부침 속에서도 조상들의 봉분을 정성껏 벌초한 자손들의 마음씀이 곱다.

뉴스에서는 이번 최장기 추석연휴에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 수가 사상최대라고 하면서 점차 변해가는 명절 풍속도를 조명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주변에는 차례와 벌초를 대물림하여 지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과거와 비교하여 형식이 간소화되어 벌초대행업이 성행하거나 추석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대신 가족여행을 계획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간소하게라도 차례를 지내고 벌초와 성묘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추석의 풍속도이다.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맞이한 추석의 풍경은 시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항상 귀성/차례/벌초/성묘의 기본 요소를 품고 있던 터라 별 다른 생각이 없던 차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한 게스트가 추석 뒤 끝에 나와서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추석에 의례적으로 행하는 형식(차례와 성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가 말하기를 '차례'는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의 잔재로 남아 있는 형식에 불과하고, 자신은 유학자가 아니므로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고 했다. 일견 타당하고 논리적인 견해이고,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차례와 성묘는 조상을 경외하는 마음을 담는 그릇이므로, 마음이라는 내용이 같다면 그릇이라는 형식은 바뀌어도 무방할 것 같기도 하다.

한편 형식에 대해 너무 경직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 주변의 대부분의 지인들은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그 지인들 중에 유학자로 특정될 만한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유교경전 한 구절 진지하게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유학자도 아니고 유교에 심취한 것도 아닌데, 매년 차례와 성묘를 반복하는 것은, 이러한 세습된 형식을 빌어 조상-아니 가까이는 내 부모와 조부모를 기억하고 고마워하기 위함이다. 보통 형식은 내용보다 가벼이 여겨지는 경향이 있으나, 이 얼마나 고마운 형식인가.

1년 365일을 살아가면서 가까운 곳에 선산이 있다고 할지라도 얼마나 자주 찾아가서 내 부모와 조상을 기릴 것인가.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기회가 마련되어야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매년 어버이날도 있고 부부의 날도 있고 어린이 날도 있는게 아니겠는가.

돌아가신 부모와 조부모를 비롯한 조상들에 대한 관념적인 고마움과 경외가, 추석이라는 계기로 '차례준비나 벌초' 등의 품을 더해 성묘의 형식으로 구체화 되고, 이 구체적인 행위가 후대에 효과적으로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는 구조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럽다.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의 '차례'에 대한 개인 소견을 계기로 추석 명절 '차례와 성묘'라는 형식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의례적으로 반복해 왔던 조상에 대한 경외와 그 표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앞으로 생활의 변화에 따라 조상을 기리는 마음을 표현하는 형식들은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으나, 그 본질적인 의미만은 새기면서 이 절기를 맞이한다면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데 의미가 더 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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