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길(산이면 건촌 출신)

 
 

번데미에서 신작로에 올라 해남읍 방향으로 조금 가면 마산면 학의리 입구에 이른다. 산 아래 남향으로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 앞길을 지나는 코스다. 학의리는 최근까지 '김해김씨 재경노송종친회' 일에 많은 관심과 열의를 보이시던 왕택이 아재(작고) 마을이다. 내 아버지께서 소년시절 학의리를 오가며 왕택이 아재의 어르신으로부터 한학을 배우셨음도 예전에는 몰랐는데, 아버님은 그 공부의 인연으로 1950~60년대에 건촌에서 서당을 열어 적지 않은 후학을 양성하셨다.

이 학의리에서 '육일시'로 나가는 길 초입 우측에는 우리 고조부님의 묘소가 있다. 고조부께서는 두 분의 아들을 두셨는데 그 중 차남이 큰집 당숙 앞으로 양자를 가셔서 지금의 영철이 형님네 일가의 증조부가 되셨다. 양자로 가신 이 증조부의 양부께서는 결혼 직후 신접도 꾸리시기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양모님이 평생을 수절하시며 정숙한 삶을 사셨기에 여러해 전 건촌 마을회관 앞에 '효열숭덕비(孝烈崇德碑)'를 세워 후대를 위한 귀감과 미담으로 전하고 있다.

학의리를 지나 마을 뒤쪽 고갯마루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펼쳐지는 전경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저 아래 하얀 파도가 밀리는 검푸른 바다와 그 건너 영암 쪽으로 병풍처럼 전개되는 흑석산 연봉들은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 중 하나다. 멀리 서쪽으로는 아스라이 목포의 상징 유달산도 보인다. 이 고개에 올라서면 바로 앞쪽으로 '개바우'라고 부르던 좀 큰 바위가 있다. 외가까지 가는 중간쯤으로 보통은 이곳에서 숨을 돌리며 땀을 씻었다. 어머니께서 친정길 이바지로 머리에 이고 가시던 찰떡 석짝을 내려놓고 쉬는 곳이기도 하다. 바다 한 가운데로 길게 뻗어 나온 마산면 연구반도의 그림 같은 모습과 그 배경인 흑석산의 웅장한 자태 때문이겠지만 이곳은 외가에 가는 길에서 전망이 제일 좋은 곳이다.

개바우에서는 북동쪽 저 멀리 대밭으로 둘러싸인 외가동네도 내려다보였다. 그 아름다운 바다가 지금은 농경지와 담수호로 바뀌어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산이면의 남쪽 바다와 더불어 맛좋은 굴과 세발낙지의 국가대표급 주산지였고, 요새 말로 하자면 연안어족의 산란장으로 생태계의 보고였는데 아쉬운 일이다. 어머니와 누님들은 가끔 바다에 나가 꼬막이며 고동, 비틀이며 쏙대기를 잡아다 삶아주었다. 꼬막이나 고동을 핏빛 국물이랑 함께 까먹고, 비틀이는 꽁무니를 동전구멍으로 톡! 잘라 쪽~! 빨아먹으면 그 맛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다.

그 바다의 초입인 산이면 구성리와 영암의 삼호읍 사이, 그리고 금호호 쪽으로는 화원면 사이를 30년쯤 전에 방조제로 막은 것이다. 경제성으로도 농지보다 바다가 세 배 이상 높다고 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고향에 다니러 오가는 길에 그 방조제를 지나면서는 나는 지금도 담수호로 변한 영암호 쪽으로 눈길을 주는 데 인색한 편이다. 공사 초기부터 느껴온, 이 바다를 막지 말았어야 했다는 원망이 아직도 얼마쯤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건촌까지 마지막 쉼터인 방조제 중간의 '해남광장'을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 있는 동창 박종욱(전 산이동교총동문회장) 시인의 '이두(二頭)의 딸' 시비(詩碑)로부터 다소간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개바우를 뒤로하고 창꽃이랑 할미꽃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가 철따라 피고 지던 길, 맹감이며 도토리가 올망올망 열리고 칡넝쿨이 다투어 뻗는 산길을 내려간다. 내가 젊은 날에 판소리나 육자배기라도 좀 배워놨더라면, 목청을 돋아 한 자락 읊으며 걸었을 법한 길이다. 요즘은 한물 갔지만 '꿈에 본 내 고향'이나 '비 내리는 고모령'도 괜찮을 것이다. 산을 내려 동쪽으로 좀 가면 산기슭 큰 소나무들 안쪽으로 숨은 듯 조용한 원항리가 나타난다.

이 마을 앞 들판을 건너는 중간에는 오래 전에 만들어졌음직한 콘크리트 수로가 길 따라 뻗어있었는데 그 수로를 타고 맑은 물이 졸졸 흐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쩌면 이제 수로는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내 기억 속의 원항리는 소설가 김유정의 '동백꽃'이나 황순원의 '소나기'같은 단편소설의 무대였음직한 산골 마을이었다. 동네 앞 논들을 지나 작은 언덕길을 오르면, 황산면 사거리에서 육일시를 거쳐 마산면 소재지와 맹진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곳을 '세경다리'라고 불렀는데 오래된 다리의 기억과 함께 허름한 주막인지 점방인지도 있었던 것 같다. 언제 어떤 경로에서였을까? 그곳 이름이 세경다리가 아니라 '소경다리'며 옛날 인근에 살던 앞을 보지 못하는 젊은 여인의 러브스토리와 관련 있는 지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듯하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난 고향의 이곳저곳, 마을과 길, 산과 들, 골짜기와 바다 등 수많은 대상과 사람들이 곧 가지가지 사연들의 소재이자 전설의 보고임을 생각하게 한다. 세경다리부터는 외가 마을 덕인리와 가까워 그 인력권 안에 들어가는 지역이다.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신작로에서 왼쪽 밭둑길로 접어들어 조금 가다 다시 논길을 지나고 작은 언덕을 오르면 바로 눈앞에 짠! 하고 검푸른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외가동네, 대망의 덕인리가 나타난다.

큰외가는 마을의 위쪽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다. 넓은 마당 주위로는 대나무와 함께 동백나무와 감나무, 앵두나무들이 있었다. 마당 왼편에는 마구청이 달린 사랑채가 있고, 살팍 가까이는 우물이 있었다. 봄날 집 뒤 텃밭에는 노랑 장다리꽃 위로 나비랑 벌들이 한가롭게 날았다. 큰외가에는 우리 집에 없던 시계며 유성기도 있었다. 안방 벽에서는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벽시계가 금빛 봉알을 조용히 흔들며 시간마다 부드럽게 종을 쳤다. 내 어린 때에 이미 허리가 많이 굽으셨던 외할머님은 마루 밑 벌통에서 채취한 꿀을 살그머니 떠다 주셨고, 가을에는 외사촌 누님들이 크고 먹음직스런 꾸리감을 따주고는 했다. 명절이면 조청을 듬뿍 적셔서 먹던 시루떡이며 쑥떡은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마을 앞에 있는 큰 방죽에는 우아하고 탐스러운 연꽃이 커다란 연잎과 함께 가득했다. 봄이면 동네 앞의 우뚝한 영매산에는 연분홍 화려한 창꽃이 온 산을 덮었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 뒤 신작로를 따라 노하리 쪽으로 조금 가면 바다가 나타났다. 특히 달 밝은 밤 이곳 잔잔한 바다위로 흑석산의 장엄한 그림자가 드리우던 모습은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며칠을 지낸 뒤에 돌아오는 인사를 할 때면 세 분 외아재와 외아짐께서 언제나 얼마간의 용돈을 쥐어주셨다. 빨간 1환짜리며 5환짜리 지폐 몇 장, 어떤 때는 10환짜리도 주셨는데 그게 얼마나 큰 돈이었던지 외가에 갔다 올 때면 늘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산이동교가 있는 금송리 점방에서 1환이면 달고 맛있는 비과를 열개씩이나 살 수 있었고, 입에 넣으면 볼이 터질 것 같던 큰 눈깔사탕을 두 개나 주던 때 이야기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외가에 가는 길도 상전벽해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산과 바다가, 까끔과 들이, 마을과 사람들이 많이 변했거나 사라진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꿈속처럼 아련하고 아름다웠던 그 길과 동네, 산과 들과 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없이 다정다감하고 포근했던 외가 어른들과 사촌들 경춘이 형과 경성이, 정욱이와 경표, 경준이를 비롯한 형제자매들과의 추억만큼은 '내 마음의 앨범'인 듯 그 시절 그대로를 온전히 간직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가고 삶이 건조하게 느껴질수록 그 영상들은 더욱 선명하고 귀한 모습으로 다가와 나를 격려하고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 산이동초등학교 전경.
▲ 산이동초등학교 전경.
▲ 숙직실.
▲ 숙직실.
▲ 미끄럼틀과 화장실.
▲ 미끄럼틀과 화장실.
▲ 화장실.
▲ 화장실.
▲ 사택.
▲ 사택.

졸업생 3천여명 길러낸 산이동초교

1946년 설립, 2002년 폐교

 
 

산이동초등학교는 지난 1946년 10월 20일 산이면사무소에서 5km 가량 떨어진 금송리 471에 설립됐다. 교사부지 1만345㎡, 운동장 7475㎡로 총 1만7820㎡의 규모로 지어졌으며 교실 5동, 숙직실 1동, 관사 2동, 창고 1동, 화장실 3동이 있었다.

설립된 해 11월 1일 산이동국민학교로 개교했으며, 1984년 3월에는 병설유치원을 개원했다. 1996년에는 산이동초등학교로 개명했으며 2002년 제52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3월 1일 폐교했다. 총 졸업생 수는 3197명이다.

초대 교장은 지난 1948년 6월 1일 부임한 임인봉 교장이며 21명의 교장이 산이동초등학교를 거쳐갔다. 운영위원장으로는 1946년에는 산이동초 기성회 1대 회장으로 박종관 씨가 활동했으며 8대부터는 육성회로, 16대에는 운영위원회로 명칭이 변경됐다.

산이동초등학교의 교기는 남각산의 두 봉우리를 담아 씩씩한 기상과 정기를 이어받으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와 함께 나뭇잎과 닻이 그려져 있는데, 무한한 바다의 자원을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굳은 의지를 가지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산이반도 양 옆은 바다였으며, 지금은 바다를 막아 해남호와 화원호가 됐다.

학교의 상징에는 평화·안정·혁명을 뜻하는 교목 향나무, 굳센의지·불타는정열을 나타내는 교화 동백, 교색은 슬기로운 지혜와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라는 의미에서 녹색으로 지정됐다.

산이동초등학교의 교가는 유인국 씨가 작사·작곡 했으며 1절 가사는 '남각산 굳센기상 바라보면서/북구해 파도소리 노래로 듣고/웅장타 희망에 찬 우리들의 짐/명랑코 참신하다 우리 산이동'이다.

해남교육지원청에 따르면 산이동초등학교는 폐교 이후 지난 2008년 6월 20일 관광식품개발연구소 목적으로 매각됐다. 매각 이후 건물은 철거됐으나 별도의 사업이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빈 터로 남아있다.

박수은 기자 pse@h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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