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길 향우(산이면 건촌마을 출신)

전국 각지에서 많은 향우들이 고향 해남을 잊지 않고 꾸준히 사랑을 보내고 있다. 해남신문은 향우들이 해남의 옛 모습을 회상하고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기고문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경기도 구리에 거주하는 산이면 건촌마을 출신 김영길 향우는 산이동초등학교 10회 졸업생이다. 김 향우의 글을 통해 해남의 옛 정취를 함께 떠올려보길 바란다. <편집자주>

 
 

영천이 형님은 얼마 전까지도 간간이 마산면 덕인리 외가에 함께 가자고 채근을 하셨다. 기회가 있을 때면 광주에 사는 동생 길남이한테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큰외숙모께서 여러해 전에 아흔을 넘기셨는데 이래저래 미루다보면 그 분 생전에 한번이라도 뵐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별 대답을 하지 못했으나 형님의 속마음은 익히 알고 있다. 연로하신 외숙모님을 뵙자는 마음에 더하여, 어린 날 외가와 관련한 꿈같은 추억들과 향수를 현실로 찾아보고 싶은 바람임을 모르지 않는다. 나로서는 여러 해 전 은퇴하신 형님의 일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마산면 외가를 일부러 찾아 나서기는 쉽지 않은 형편이다. 집안 행사로 가끔 건촌에 내려가는 때에 잠시 짬을 낼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거리나 시간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갔다. 그간에도 형님의 외가 쪽을 향한 정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깊어지셨으나 나의 무덤덤한 반응 또한 별로 달라짐이 없다. 형편이 될 때 혼자서 다녀오셔도 좋지 않겠냐고 하면 형님은 섭섭한 내색을 하셨다. 그냥 가자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을 형제들이 함께 더듬어가는 행로를 꿈꾸시는 것이었다. 굳이 나의 입장이라면, 내 몫의 옛 추억과 향수를 원형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실제의 여행이 머뭇거려지는지도 모른다. 형님의 그런 간절한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드리지는 못하면서, 근래에는 오히려 내 쪽에서 외가에 가는 옛 길을 찬찬히 더듬는 버릇이 생긴 배경이다.

외가에 가는 길은 집을 나서서 뒷집 영택이 아재네 대밭 옆으로 이어지는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출발한다. 영택이 아재네 대밭은 둥그런 버섯모양의 커다랗고 멋진 팽나무와 함께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건촌 큰마을의 상징이자 중심이었다. 대밭과 집터가 넓어 아이들이 자주 모여 놀았는데, 세월이 무상해서 고향 까치들이랑 크고 작은 새들의 보금자리였던 팽나무와 대밭은 사라지고 밭으로 변한지 오래다. 큰마을의 등성이 부분인 주산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영복이 형(작고)네 집 살팍을 지나게 된다. 영복이 형은 해마다 추석 무렵 초송리 산이중앙교에서 열리던 리 대항 축구대회에서 노송리팀의 주전 공격수였다. 그 집을 지나면서 비로소 마을의 동쪽, 외부로 향하는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건촌에서 해남읍이나 마산면 방향으로 가는 길은 노송리와 마산면 학의리의 경계인 번데미에서 신작로와 만나기까지 들길과 오솔길로 이어진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지만 할머니께서 계곡면 비슬의 동복오씨 가문에서 우리집으로 시집을 오시고, 어머니께서 마산면 덕인리 여흥민씨 집안에서 신혼의 꿈과 함께 가마타고 오신 길이다. 영천이 형님이 해남중학에 입학해서 자취방을 구하기 전 몇 달 동안 읍까지 삼십리를 날마다 걸어서 통학하던 것도 이 길이었다.

그 시절 우리 형제들에게 외가에 가는 십리 남짓의 길은 세상에서 가장 멀고 가슴 설레는 여로였다. 고령이신 외숙모님을 뵈러 가자는 형님의 잦아들지 않는 바람은 이런 어린 날의 추억과 진한 향수가 어우러진 가슴 절절한 속내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영복이 형님네 살팍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논길을 건너면, 바로 크고 검푸른 소나무들이 모여 있는 '장렬이네 솔밭' 길로 들어선다. 넓지 않은 이 솔밭의 황톳길을 벗어나면 오른편으로 '빗독까끔'을 만난다. 비교적 평평한 야산이면서 사방이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 탓이었는지 우리는 이 까끔을 자주 찾았다. 봄에는 연분홍 고운 창꽃을 따러 갔고 보드랍고 달콤한 삐비를 뽑으러 다녔다. 새들의 알이나 버섯도 값진 전리품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빗독까끔은 여름이나 가을철 학교수업이 끝난 오후 또는 주말에 망태를 메고 갈퀴나무를 하러가는 주된 야산이었다. 이 빗독까끔의 남쪽으로는 생전의 어머니 말씀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면 도깨비가 나타난다는 좁고 긴 논골짜기 '가락골'로 이어진다. 가락골을 건너면 '큰까끔'이고 그 너머는 마산면 '오가시(오호리)' 마을이다. 오가시로 시집을 가셨다가 광주로 이주해 사시던 둘째 누님이,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먼 길 떠나신 것이 벌써 여러 해 전 일이다.

빗독까끔을 뒤로하고 북동방향으로 조금 가면 정면으로 야트막한 '안산'을 만난다. 이 산의 윗부분은 넓고 평평해서 '뽈바탕'이라 부르던 흙바닥 운동장이 있었다. 여름방학이나 추석 무렵이면 형들이 이곳에 모여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고는 했다. 기억나는 주전급으로는 건촌에 영복이 형(작고), 변창길 형, 영신이 형(작고), 영천이 형이 있고 노송리에는 기봉이 대부님, 영문이 형을 비롯해서 여러 선수들이 있었다. 그때 형들은 지금의 프로선수들보다 공을 더 잘 찼다.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뿌사리들처럼 내달았다. 누군가 공의 생고무 쥬브에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을 때는, 왕방울처럼 충혈된 눈이 곧 튀어 나올 것 같고 목의 힘줄과 함께 검붉게 부푼 양쪽 뺨도 금방 터질 것 같았다. 예닐곱 때였을까 형들을 따라가 구경을 하는데 하프타임이 되었다. 형들이 나한테 공을 맡기고는 모두들 산 아래 샘으로 물을 마시러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 혼자 남게 되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한 낮이지만 사방이 괴괴한 산 속의 적막감을 감당하기 어려웠던지 별 생각 없이 공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참외나 수박 내기의 중요한 시합이었을 텐데 후반전을 치를 수 없게 된 형들한테 나중에 혼이 난 일이 있다. 근처 잔솔들 사이의 꿩이나 그 아래 논의 뜸부기들이 작은 기척이라도 보냈더라면 그런 불상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뽈바탕에서 빗독까끔 너머 가락골 쪽을 바라보면 검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인 동창 석배네 작은 초가가 보인다. 학교 때 그는 공을 잘 찼다. 그 때는 똥볼만 높게 차도 대단했고 보통은 공과 함께 고무신을 날리는 수준들이었지만 석배는 한 수 위였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마을이랑 사람들, 산과 들, 바람이랑 별이랑 더불어 살던 시절만큼 행복할까? 석배라도 이 시대의 허망한 가치들에 휘둘리지 않고 정 많고 순수하던 옛 삶 그대로를 살았으면 좋겠다. 뽈바탕의 동쪽으로 작은 소나무 숲길을 따라 좀 내려가면 '번데미'에 이른다. 오솔길이 끝나고 상공리에서 해남읍으로 가는 신작로와 만나는 대목이다.

번데미는 인적이 드물고 시커먼 소나무들이 쉬~쉬 바람소리를 내는데다 주위에 오래 된 무덤들이 있어 대낮에도 으스스하다. 비라도 오는 깜깜한 밤에는 진짜로 도깨비며 귀신이 나타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친구 기섭이가 해남중학에 갓 입학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영석이 형과 자취를 하던 기섭이는 난생 처음 헤어져 지내게 된 어머니와 식구들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영석이 형은 주말에도 공부나 하라면서 집에 가지 못하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비 내리는 어느 토요일 밤 형 몰래 건촌을 향해 길을 나섰다. 빗속을 걸어 이곳 번데미에 이른 것은 출발한지 한 참이 지나서였다. 집에 거의 다 왔다고 안도하며 신작로를 벗어나 어두운 황톳길에 발을 내딛자마자 그는 그만 쭉~ 미끄러지고 말았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시커먼 소나무들과 무덤들이 그에게 몰려와 덮치는 듯 했다. 전란 때 사람들이 많이 죽은 곳이라는 이야기며 낮에도 귀신이나 도깨비가 나온다는 어른들 말씀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는 귀신이 자기를 기다리다가 넘어뜨린 것이라고 - 그래서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진짜로 죽일 것 같았다. 그렇게 어둠 속에 엎어진 채로 한 참을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이 좀 들자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기기 시작했다. 얼마쯤 기어갔을까? 빗속에서 어렴풋이 사람소리가 들렸다. 뽈바탕까지의 중간 쯤 길 왼쪽에 있는 초가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때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이제는 귀신이 자기를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뛰었다. 어둠 속에 휙휙 지나가는 숲이며 나무들이 모두 귀신같았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밤, 온 몸이 흙탕으로 범벅이 된 채 어머니를 부르며 마당에 들어선 그를 본 가족들은 단체로 혼절을 하다시피 했다. 식구들의 눈에는 기섭이가 영락없는 귀신이거나 도깨비였을 것이다. 당시 상황은 1980년대 초에 있었던 '이산가족 찾기'에서의 극적인 만남 장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 산이면 건촌 큰마을과 작은마을<아래 사진> 모습.시간이 흘러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고향마을의 추억은 변치않고 기억 속에 남아있다.
▲ 산이면 건촌 큰마을과 작은마을<아래 사진> 모습.시간이 흘러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고향마을의 추억은 변치않고 기억 속에 남아있다.
 
 
▲ 산이동초등학교 10회 졸업생.
▲ 산이동초등학교 10회 졸업생.

작은 시냇물 흐르던 평화로운 '건촌'

산이면소재지 동서쪽이자 해남과 완도를 잇는 지방도 806호선 오른편 위치한 건촌마을은 황산면과 마산면에 인접해 있다.

건촌(乾村)마을의 옛 이름은 구교리이다. 지난 1789년에 발행된 호구총수에 따르면 해남현 산이면 구교리(舊橋里)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구교는 간척공사를 하기 이전에 마을에 있었던 다리이다.

해남문화원 '우리마을의 삶과 문화'에 따르면 건촌마을은 1500년대 후반 노송마을 입향조의 후손 김련지가 이곳으로 분가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건촌마을은 큰마을, 작은마을, 시목동으로 나뉜다. 몇 십년 전에는 마을 중앙으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커다란 팽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로는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이전에는 마을 동남쪽에 사그섬이라는 섬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사그섬에 있는 논은 풍월배미라고 불렸다.

저수지로는 건촌제와 건촌2제가 있다. 건촌제 수문에서 동쪽으로 150m 가량 떨어진 '가락골'에서는 노송리 옹기요지가 발견됐다.

건촌마을 정류장 옆 소로로 100m 가량 진입하면 길 왼편으로 건촌 유물산포지가 존재하며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수습됐다.

마을의 주 생업은 쌀농사이며 밭작물은 주로 배추를 재배한다.

이전에는 마을 내 학식있는 어른이 일반 가정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며 산이동초등학교 설립 이후에는 대부분이 산이동초등학교에 다녔다.

박수은 기자 pse@h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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