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옥(해남공고 교사)

 
 

삼십년 전의 미황사는 삭막했다. 북서풍을 정면에서 받는 대웅전 건물 하나, 양철지붕 요사채 하나, 무너져가는 응진당 건물, 망자들의 위패를 모신 명부전이 전부였다. 무너지기 직전의 부도탑 주변에 잡풀은 무성했고 사람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오늘의 미황사가 있기까지 삼십여년 간 쉬지 않고 불사를 일구어낸 현공스님의 노력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집을 지어보지 않으면 건물 한 동 짓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없다. 안전과 건물의 효율성, 미적 완성도를 두고 몇 번이고 설계를 다시 고쳐야 하고 돈과 인부와 자재를 날짜에 맞게 준비하고 일하는 사람들과 생각과 손발을 맞추어야 한다. 급작스런 펑크와 사고는 수시로 일어나고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일은 멈춘다.

새집 짓고 나서 살만하니 그 사람 죽어버렸다느니, 집을 세 채만 지으면 극락에 간다느니 하는 말들은 집짓기의 어려움과 풀 길 없는 스트레스의 강도를 잘 보여준다.

공사현장을 직접 지휘 감독해야하는 스님을 괴롭히는 문제는 여럿이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시골업자와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이었다. 설계도면에 맞게 부재를 다듬고 빈틈없이 계약대로 제날짜에 맞추어 이행하는 근대적 시공방식과는 거리가 먼 시골업자들의 자기 편의주의, 예전부터 그리 해왔으니까, 일하기가 너무 까다롭고 힘들어서, 이미 톱질을 잘못 했으니까, 이 정도 했으면 다른 곳에서도 별 문제는 없었으니까, 곤조라고 불리는 터무니없는 기술자들의 자기고집 등등 이어지는 전근대적 작업관행은 어떤 힘든 일 보다 책임자를 미치게 만들었다.

미황사 전역에 불국토를 건설하려는 꿈은 아니더라도 수행자와 신도가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건물의 안전도와 단열과 공간의 효율성을 제대로 살리고 싶은 스님에게 삼십년간의 공사 현장은 하루하루 속 터짐과 수행의 연속이었다.

주변에 새로 지어진 절집 건물들의 허술한 빈틈을 자주 본다. 절의 100년 대계를 책임지고 공사를 관장하는 끈질긴 스님이 없거나, 있더라도 경험부족 상태에서 눈앞의 이익에만 눈먼 업자들에게 일을 맡긴 결과다. 미황사 만큼 정돈되고 꼼꼼하게 다듬어진 건물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삼십년의 열정. 한 삶의 전부라 부를만한 시간을 다 바쳐온 불사를 두고도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뱉어댄다. "옛날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고적한 미황사를 망쳐놨다" 이런 말만큼 스님의 삶을 부정하는 말이 또 있겠는가. 십년 선수행이 도루아미타불이 될 만큼 열 받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스님들이 거처하고 수행할래도 찬이슬은 막아야 한다. 여기에도 난방과 수도는 해결되어야하고 전기와 인터넷과 소화전은 비치되어야한다. 성직자들을 이슬만 먹고도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기는지 사람들은 사찰에 전기만 깔려도 보일러만 설치해도 눈살 먼저 찌푸린다. 수행에나 힘쓸 일이지 건물 짓기에만 바쁘다고 비꼬는 소리를 들을 때 스님이 받아야 했을 상처들은 지금도 쓰라리다.

80년대의 미황사를 떠올려보면 이 불사의 기반 없이 미황사의 어떤 사업도 그림을 그려볼 수 없었음을 생각게 된다. 하드웨어가 갖추어지지 않은 조건에서는 새로운 컨텐츠란 발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실제적으로 깨닫게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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