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미국에서 촉발된 대공황의 어두운 그림자는 북유럽의 스웨덴에게도 드리워졌다. 집권 자유당과 재벌간의 정경유착 속에서 맞이한 대공황은 노동자, 농민에게는 재앙이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시위가 확산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었다. 1931년 아달렌의 제지공장파업에서 진압군대의 발포로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눈 이 사건을 계기로 1932년 총선에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SAP)은 공공사업에 대한 획기적인 지출을 통해 실업 극복 등 노동계급의 당면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워 과반을 넘지는 못했지만 41%의 지지율을 확보해 소수정부가 출범했다.

새 정부는 도로 건설 등 대대적인 공공사업에 착수하고 주택 건설 보조금, 실업보험, 노동시간 단축, 모성보호지원금제도, 2주 유급휴가 등 복지국가의 기초가 된 사회개혁들을 단행해 나갔다. 1938년 농민정당인 '농민동맹'과의 연정을 통한 노농동맹이 형성되었고 스웨덴을 '민중의 집'으로 만들겠다는 사민당의 비전과 1974년까지 국민의 수십년간의 전폭적 지지가 오늘날 복지국가 스웨덴을 만들어 냈다. 노동자는 생산성 향상에 힘쓰고, 경영자는 무분별한 해고를 자제하며 정부는 사회복지를 확대하는 노사정간 대타협이 이루어 졌다. 임금과 노동 조건에 대한 노동자와 경영자의 교섭은 개별사업장 단위가 아닌 산업별 교섭이 이루어지면서 어떤 직장에서 일하건,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도록 하는 '연대임금제'와 산업구조조정에 발생된 실업에 대하여 노동자의 기본 생활을 보장하면서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교육 훈련을 정부가 돕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을 핵심으로하는 스웨덴의 복지체제가 구축되었다.

1980년 5월 18일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으로 촉발된 광주민중항쟁에서 전두환 군부는 국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명령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광주는 아달렌 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 이후 반민주 기득권세력의 발호 속에서 역사는 오히려 퇴행했다. 아달렌의 희생을 디딤돌삼아 개혁을 통해 복지국가로 거듭난 스웨덴과 달리 광주민중항쟁은 무차별 진압진상을 규명하고 발포명령자를 처벌하지 않으면서 그동안 끊임없이 5·18에 대한 붉은색 덧칠하기가 시도되어 왔다. 오히려 발포명령자가 반성은 커녕 자서전을 출간하여 자기합리화를 늘어놓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5·18 당시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하며 "함께 가르치면서 배운다"라는 의미에서 강학(講學)으로 불리웠던 대학생 교사들과 학생들은 항쟁기간동안 '투사회보'를 발행하여 고립된 광주시민에게 소식을 알렸고 도청에서 마지막 까지 저항하다 많은 피해를 입었다.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윤상원 강학과 박기순 강학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리워진 '님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닌 인권과 민주와 공생의 상징이다.

제37주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모두 손을 맞잡고 부른 '님을 위한 행진곡'은 80년 광주가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않고 그 희생이 씨앗이 되어 대한민국을 민주복지국가로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하겠다는 우리의 각오이자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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