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자(보길도비파원 원장)

 
 

비파원에 봄이 완전히 돌아왔다.

매화꽃과 목련은 꽃샘바람에 순식간에 흩 날려버렸지만 씨를 뿌린 적도 없는 유채꽃과 이름 모를 풀들이 낮게 피어나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한다.

민박손님으로 더 바빠지기 전에 이것들을 그려보려고 캔버스를 펼쳐놓고 있는 내게 한 숙박객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보길도의 타샤 튜더 같군요?"

"네? 타샤 튜더를 아세요?"

"그럼요. 농장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정원에서 얻은 꽃과 과일들을 가공해 팔았던 미국 할머니 작가…"

맞는 이야기다. 타샤 튜더는 미국 버몬트 주 시골에 살면서 정원과 텃밭을 일궈 작은 소출을 얻거나 이것들을 그려 팔면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자연주의 여성작가였다. '비밀의 화원'등 100여권이 넘는 동화책 삽화를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돼 많이 팔렸던 '타샤의 정원', '타샤의 식탁'같은 책은 그 독특한 자연주의 생활스타일이 전해져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1915년에 태어났으니 지금 살았으면 100세도 넘었을 그 할머니의 그림과 삽화를 어렸을 적부터 보면서 얼마나 눈이 즐거웠던가. "나도 이렇게 살았으면…"하고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타샤 튜더라는 별칭을 듣고 보니 어쩐지 이 이름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일생은 그냥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기원과 생각이 그대로 이뤄진다던가.

'보길도의 타샤 튜더….' 나는 갑작스럽게 들은 이 명명에 새삼스럽게 가슴이 울렁거린다.

거의 중노동에 가까운 그녀의 성실한 삶을 그대로 실천할 수는 없으나 작은 공간이지만 비파원을 가꾸고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일, 그리고 지금처럼 비누와 향초를 만들어 동네 아낙들이 바다에서 거둬온 다시마나 미역, 멸치와 바꿔 생활하는 일은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손님들에게 제공해 온 조식 전복죽 메뉴 때문에 쌓인 전복껍질이 만만치 않아 버릴까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도시출신인 나에게 전복껍질은 그냥 신기하기만 해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 일을 만들어주었다.

그 전복껍질이 어느 날 말을 걸어온 것이다. 손톱만 한 새끼전복부터 손바닥 크기의 전복껍질은 제각기 등에 연륜을 갖고 있으며 그게 내 눈에는 사람 사는 모양과 너무나 닮아 보인다.

모두 내면에 아름답고 영롱한 빛을 갖고 있지만 등은 천태만상이다. 어릴 때는 대부분 연한 살빛으로 매끈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생명체들이 붙어살다 떨어져 나간 흔적이 상처처럼 남아있다.

진주조개는 내부에 들어온 이물질을 뱉어내지 못하고 감싸 안으며 생긴 보석이다. 전복도 비슷하다. 깊은 바다, 맑은 물 속을 유유히 헤엄치며 살았을 것 같지만 온갖 종류의 타생명체들에게 기꺼이 등을 내어 준 표적이 있다.

한 시인이 연탄재에서 보았던 감동을 나는 전복껍질을 통해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당분간 나는 하찮은 전복껍질에 새 생명을 넣어주는 일을 할 참이다. 등에 노란 나비를 그려 훨훨 날게도 하고 싶고 푸른 물감을 입혀 바다 속으로 다시 보내주고도 싶다. 그래서 '보길도의 타샤할머니'는 오늘도 바쁘다.

문화콘텐츠가 별것이던가. 완도와 해남, 보길도만의 천연자원 전복은 그 자체로도 보물이지만 껍질이야말로 뭔가 진짜가 들어있다는 생각이다. 전복껍질에 꽂힌 요즘의 일상….

이게 어디로 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혹시 내 손에서 날아간 전복요정들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진짜 타샤 튜더 같은 명작하나 남길 수 있게 영감을 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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