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옥(해남공고 교사)

 
 

70년대 중학교 교문에서 "단결!" 거수경례를 붙이고 선도부 선배들과 무서운 학생과장이 지키는 교문을 통과할 때는 작은 두려움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학교 앞 문방구점에서는 학년배지가 없는 학생, 하얀 플라스틱 칼라가 빠진 학생, 저축강조기간 깃을 패용하지 않은 학생들은 그걸 챙기느라 북새통이었다. 단결 구호는 그때만이 아니라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면서도 어디서나 이어졌다. 교내 체육대회나 직장 친목 야유회, 술자리에서도 단결은 언제나 제일 먼저 가장 강하게 외쳐지는 구호였다. 단결 구호 속에 내재된 일방적 폭력도 모른 채 문제제기도 못한 채 우리는 긴 세월을 지나왔다.

운동을 잘하는 아이와 싫어하는 아이, 회사의 승진을 눈앞에 둔 부장과 아이를 키우느라 빨리 퇴근해야하는 아줌마의 처지가 같을 리 없다. 성적이 좋은 아이와 죽어도 성적을 올릴 수 없는 아이, 생각과 조건과 처지가 다 다른데도 사람을 한데 묶어 이 길로 가야한다고 강요했다. "싫어요" 한마디 말도 못하고 보내버린 세월들, 생각하면 지겹다.

박근혜 탄핵을 전후해서, 해남군수 구속을 전후해서 통합이라는 단어가 많이 돈다. 통합이라는 말은 단결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서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가치를 품은 좋은 말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지만 차이와 형편을 구분하지 않고 무작정 들이대면 통합이란 말의 효과는 본질적으로는 단결 구호와 비슷해진다.

민주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이다. 갈등이 싫지만 피할 순 없다. 사회의 본질이 갈등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통합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기주장을 제한 없이 마음껏 말하게 하고, 상대방 주장을 서로 들으면서 합리적인 지점을 찾아가는 것, 대화를 통한 이해와 협상과 타협의 먼 길 끝에 도달 될 수 있는 지점이 통합이다. 통합은 도착점이어야지 먼저 구호를 외쳐서 될 일은 아니다. 이 갈등을 조정 타협하여 합의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의 영역이다. 갈등 없이 봉합된 사회보다 적정한 갈등이 있는 사회가 차라리 건강한 민주사회다. 대화와 타협에도 통합을 못 만들어낼 바엔 파이를 일정비율로 나누어 협상하는 게 "통합 해!"라고 윽박지르는 것보다 결과도 바람직하고 통합의 정신에도 가깝다.

탄핵을 맞은 전국상황도, 세 번째 군수공백 사태를 맞는 해남도 그렇다. 박 군수의 비위가 법원에 계류되었을 때도 군민통합을 말하며 은근히 군수사퇴의 주장을 누르며 여론을 호도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군민 대다수는 군수의 구속과 빠른 사퇴를 바라고 있다. 통합은 애매한 물타기로 본질을 흐리며 정당한 주장을 조용하게 누르는데 자주 기여해왔다. 기울어진 여론과 다수의 주장을 흐리거나 물타기 할 때 통합이라는 말이 쓰여저선 안된다.

국민통합을 내세워 나치부역자 숙청 반대를 주장하던 사람들에 맞서 프랑스의 지성 알배르 까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는 말로 기회주의자들을 잠재웠다. 공화국을 부정했던 이들에 대한 청소도 없이 국민통합을 주장하는 것은 국민통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지금은 막무가내 통합보다 잘잘못을 정확히 가리고 공화국의 새 틀을, 군정의 바른 기풍을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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