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 향족으로 세도 누렸던 정호장
해남인물사 서막 연 금남, 미암 등 후원

해남의 인물사를 놓고 볼 때 조선시대 이전에는 해남을 대표할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해남이 중앙에서 너무 떨어진 변방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때까지 해남은 중앙에 진출할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는 학문적 여건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던 탓인지 아직까지 조선이전의 기록에 나타난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조선초 진도와 합군으로 해진군이었던 해남이 다시 해남현으로 분리되고 이곳 해남읍이 현치소(縣治所)로 터를 잡으면서 금남 최부와 미암 유희춘 등 많은 문인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같은 시기에 한가지 주목할 상황이 나타난다. 그것은 이들 많은 인물들이 호장(戶長)이라는 직책의 정호장의 가문을 중심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해남 학문의 연원으로 해남을 문헌지방으로 만들었다는 금남 최부, ‘미암일기'의 저자인 미암 유희춘, 녹우당 해남윤씨의 문을 연 어초은 윤효정, 석천 임억령, 여흥민씨의 해남 입향조인 민신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이 가문을 토대로 훌륭한 인물로 성장해 간 것이다.
또한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 어초은의 아들인 귤정 윤구, 그리고 더 연결하면 고산 윤선도까지 포함할 수 있는 해남 육현의 대부분이 해남정씨와 혼인을 맺거나 후손으로 관계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한 인물이 나오기도 힘든 상황에서 이처럼 많은 인물들이 해남정씨라는 한 가문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정호장에 장가든 인물들

 해남정씨는 지금 대채로 거의 잊혀진 성씨에 속한다. 해남윤씨 족보에도 해남정씨 대신 초계정씨로 소개되어 있다. 해남정씨는 조선초『세종실록지리지』에 제일 첫번째 성으로 나와 있으나 이후 『동국여지승람』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를 통해볼 때 해남정씨는 조선초를 중심으로 번성했다가 이후 자손을 잇지 못하고 끊긴 집안임을 알 수 있다. 해남정씨는 직계자손이 번성하지 못해 본관 마져 없어져 족보나 가승 등 여타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나두동(羅斗冬)이 찬(撰)한 <보략(譜略)>이 「해남윤씨문헌(당악문헌)」에 실려있다. 나두동의 <보략>에 의하면 해남정씨의 시조 정원기(鄭元琪)는 려말선초(麗末鮮初)의 인물로 고려시대 이래 조선초기까지 대대로 호장직(戶長職)을 세습한 가문으로 해남 일대의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부호(富豪)였다고 나온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고문서집성』에 보면 해남정씨가 고려말 이래로 호장직(戶長職)을 지낸 향족 이었다고 쓰여있다.
 또한 정재전(鄭在田)은 태종12년(1512)에 진도와 해남을 합쳐서 된 해진군의 관아와 객사를 지을 때 사재를 대었으므로 향역(鄕役)을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진군이 다시 해남·진도현으로 나뉘자 해남현 관노비로 자신이 진고(陳告)하여 받은 노비 62口를 바쳐 그 공으로 그의 자손은 향리역(鄕吏役)에서 완전히 면제받았고 그후 그의 자손은 해남의 향족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점을 볼 때 해남정씨는 이곳 해남읍에 치소를 정할 때 강력한 향족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해남에서는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막강한 힘을 발휘한 향족 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강력한 향족이었던 정호장이 몇 대를 잇지 못하고 몰락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중에 하나는 정호장의 후손이 몇대 이어지지 못하고 끊기고 말았다는 것이고, 이와 함께 당시만 해도 아들이나 딸 모두 재산을 똑같이 나누는 '남녀균분제'로 인해 정호장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위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결국 자신의 집안은 지키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한 결과가 된다.
그러나 정호장은 자신의 경제력과 정치력을 통해 명석하고 뛰어난 인물들을 데려와 후원을 하고 사위를 삼음으로써 해남의 훌륭한 인물로 키워낼 수 있었다.

정호장이 터를 잡은 해리

정호장이 살았던 곳은 해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해리와는 행정구역의 범위가 다소 다르지만 해남군청을 뒤로 한 향교일대의 지역이 해리에 속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암이나 최부 등이 해리에서 살았다고 기록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범위를 생각하게 한다. 이곳은 진산인 금강산의 바로 산기슭 아래로 향교를 비롯하여 옛 건물들이 있어 치소가 정해진 후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씩 터를 잡고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남윤씨문헌」권지일, 어초은공편에는 정호장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정호장(鄭戶長)은 일찌기 본현에 복기(卜其)를 정했는데, 동문밖 금강산 석봉(石峯)아래다. 오세형제(五世兄弟)가 계적(桂籍)에 연속하여 등과(登科) 하였는데, 임석천 형제·윤귤정 4형제·유미암 형제의 등과 역시 그 터에서 나오니 …, 만약 정호장이 없었다면 그 내외자손이 누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으며 한곳에 모일 수 있었겠는가?」
이 기록에서는 정호장이 석봉(石峯)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고 되어있다. 그 석봉이 팔각정 위 형제바위를 말한다면 팔각정 아래쪽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해남윤씨 집안에서 펴낸 ‘녹우당의 가보' 어초은 연혁에는 어초은이 결혼 후 해남의 수성동(군청뒤)에서 현재의 연동으로 왔다는 기록이 나와 있어 이 일대를 중심으로 세거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주목되는 한 고가가 3000여평의 넓은 대지에 한 채 있었다. 문화재로의 지정가치도 있어 보인 이 고가(김학수 고가)는 당시 이 지역에 한 세도가가 살았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집을 어른들은 해남정씨들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으나 이를 증명할 만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해남육현에 속한 인물들과 이들 인물들의 해남정씨와의 관계는 조선초 해남이 치소를 이곳 해남읍에 정하고 나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해남의 새 터가 해남읍에 정해지고 기초가 닦여갈 무렵 해남정씨라는 향족이 등장하고 이를 중심으로 해남의 인물들이 성장하기 시작하는 당시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성장한 인물들이 해남의 육현으로 추앙 받아 해촌사에 모셔져 있다.
정윤섭(향토사 연구가)

<사진 위 ◇ 해남읍 수성리에 위치한 김학수 고가 사진 아래 ◇ 해촌사 : 해남의 육현을 모시고 있다(해남읍 금강골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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