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배려

우리는 ‘늙는다는 것’ 이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기 전에는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인들 속에서 미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만년의 불행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인이 된 상황에서 가장 절망적인 것은, 노인들 자신이 능동적으로 그 상황을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있어 또 다른 불행은 자신이 마음속으로 느끼는 ‘나’ 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불일치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노년이 인생의 결론은 아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여성해방 운동가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노인의 지위’가 노인 자신이 정복하고 취득해 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집단의 필요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돼 왔다는데 주목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노인의 인간조건 중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면이라고 지적한 보부아르는 이제 노인은 하나의 인간존재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며 이를 토대로 개인적·사회적인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무릇‘삶이란 살아보았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훈련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고령화 사회, 혹은 더 나아가 고령사회의 도래에 대한 숱한 지적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감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을 ‘분명한’연령계층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그저 ‘노인’으로 간주됩니다. 60이든, 70이든, 100세를 넘든 노인일 뿐이라는 거죠. 이는 20대와 3, 40대가 모든 면에서 구별되는 반면 60을 넘어서면 이러한 구분에서조차 제외되기 쉽습니다.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나타내면서도 노인들이 그것을 표시하면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젊은이들이 노인을 보는 눈은 이처럼 기형적으로 노인을 인간의 범주 밖에서 바라보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엄청난 오류가 아닐 수 없죠. 이 같은 기형적 시각에 대한 보부아르의 문제 제기는 과격할 정돕니다.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또는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서양문명의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다”라고. 우리 역시 노인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얼마 안 있어 노인문제는 인류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치명적인 난제로 우리를 짓누를 것이 분명할지도 모를 일. 노년이 결코 인간의 삶에 있어 결론이 아니듯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때입니다.
해남도 예외는 아닙니다.
2002년 말 현재 해남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전체(9만2천647명)의 17.4%인 1만6천163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이와 같은 수치는 지난 96년 전체인구 10만1천548명 가운데 12.3%인 1만2천537명을 차지하던 노인인구 비율에 비해 5.1% 포인트가 증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읍을 벗어나 농어촌지역으로 가면 노인인구가 절반을 넘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미 초고령 사회가 된 셈이지요. 이러한 고령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은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나마도 지원은 미미한 형편이어서 있는 곳마저도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바뀌어 ‘뒷방 늙은이’란 옛말입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꿈꾸는 은빛 노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이 마음놓고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아울러 알찬 프로그램으로 배려해 준다면. 한마디로 복받는 일이겠지요.

'뒷방 늙은이'란 옛말

이쯤해서 한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현재 해남에는 미활용되고 있는 폐교수가 14개교나 됩니다. 그동안 폐교된 32개교 가운데 나름대로 효용가치가 높은 학교는 매각이 됐지만 절반 가량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상탭니다. 이를 군이 매입해 예를 들어 ‘자립형 실버타운’으로 조성해보면 어떨까요. 기존의 시설을 조금만 손질하면 그리 큰 예산이 들지도 않을 것이고. 활동공간도 넉넉해 어느 정도의 보조만 이뤄지면 운영에도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군차원의 신중한 검토를 기대합니다.
주역(周易)에 ‘낙천지명 고불우(樂天知命 故不憂)’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은 ‘천명을 알고 즐기므로 근심 걱정이 없다’로 해석되는 바. 자연의 섭리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요구되는 인생길에서 혹여 노년의 삶이 고통스럽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사회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제2막’을 위한 현실적인 배려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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