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는 국권을 빼앗긴 국치일과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절이 들어있다. 역사의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어둠의 질곡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때는 민족을 배신한 자발적 협조자들이 있었던 반면 어둠에서 빛으로 빠져 나올 때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해서 이루어져 친일세력 청산에 실패하고 오히려 신생독립국가를 친일파가 장악한것이 우리 현대사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을사년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을씨년스러운'이라는 말처럼 싸늘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기울어져 가는 제국의 현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신의 부귀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기고 식민통치에 부역했던 친일 반민족행위자들과 후손들이 해방 후에도 친일에서 친미로 변신해 지금까지도 사회 각계에서 그 막강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부분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대물림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한다' 자조적 한탄이 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중국에도 국치일이 있다. 1931년 9월18일 선양(瀋陽) 북쪽 류타오거우(柳條溝) 남만주철도 선로가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05년 러ㆍ일전쟁 후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이 중국 군벌의 진출과 러시아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벌인 사건이었다.

일본은 별다른 피해도 없었던 이 사건을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쉐랑(張學良)의 소행이라고 덮어씌우고, 철도보호를 명목으로 군벌 주둔지를 기습하면서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자작극을 기점으로 중국 침략을 노골화하여 만주 전역을 무력으로 장악한 일본은 바로 이듬해인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폐황제 푸이(溥儀)를 앞세워 괴뢰정부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배경에는 제국주의 침략야욕과 전쟁을 통해 경제위기 불황을 벗어나려는 속셈이 자리잡고 있었다. 만주와 몽고(滿蒙)를 일본은 실업자구제와 불황타개, 식량수급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에 특별한 행사를 하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그 날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관을 세워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중국의 발전(中華振興)을 다짐하기 위한 행사를 하고 있다. 선양의 9·18역사기념관에는 勿忘 九·一八 (9·18을 잊지마라)이라는 장쩌민(江澤民)전 주석의 휘호가 건물전면에 씌여 있다.

대한국민은 국권을 잃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애썼던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 헌법전문에 명시되어 있다. 건국절 논란은 국치일과 일제의 식민지배의 쓰라림과 역사적 책임을 희석시키고 친일파들이 오히려 건국유공자로 둔갑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시절 출애굽을 기억하며 쓴나물과 무교병을 먹었던 것 처럼 나라를 잃었던 쓰라린 기억을 후세에 전하고 다시는 속박과 굴종의 역사적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8·29 국치일을 잊지 말자. 이것이 진정한 역사교육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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