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교(해남YMCA 이사장)

▲ 1979년 2월 8일 해남YMCA 농민회 창립총회.
▲ 1979년 2월 8일 해남YMCA 농민회 창립총회.
 
 

해남군은 한반도의 서남해안 땅 끝으로 고대 이래 신라, 고려시대에는 중앙과 연결된 유명인물이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해남정씨 정호장 가문과 연결되어 해남에 들어온 금남최부, 석천임억령의 가문, 미암유희춘 가문과 윤효정으로 비롯된 해남윤씨가문이 역사에 나타난다.

해남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항쟁지이며 조선말 의병항쟁의 마지막 항쟁지이기도하다. 일제시대에는 3.1 만세운동의 기록이 보이고 전남사회운동협의회사건과 소작쟁의 등 크고 작은 항일운동의 흔적이 나타나지만 해방이후 1948년 추수폭동이후 1950년 보도연맹사건과 나주부대 사건이후 사회 분위기가 1950년 지방좌익들에게 피해를 입은 유족들과 반공제일주의로 일반적인 지역운동은 자취를 감추었고 5.16 군사정변이후에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부독재에 지역운동은 싹을 틔우지 못하였다.

다만 1969년 3선 개헌반대, 1975년 유신헌법 국민투표 반대운동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 일부 교역자와 교인들이 참여한 정도이다.

한국YMCA는 그 때까지의 소시민을 위한 사업이 노동자 농민 등 경제개발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해왔다는 자기반성의 결과로 1971년 대구에서 열린 제21차 전국대회에서사회개발사업 참여를 결의하고 1973년 제22차 전국대회에서 농촌사업계획을 확정하였다.

해남YMCA는 최우열총무가 연맹의 정책을 지역에서 받아들여 농촌고리채 해결과 자조자립을 목표로 양곡조합, 신용협동조합결성을 추진하며 당시 강원용목사가 운영하던 크리스챤 아카데미 농촌사회지도자교육에 농민들을 1976년 9월부터 참여시키고 장기교육(2주간)까지 보내었다.

지역에서는 그전에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농촌지도자 교육간사인 이우재를 비롯 최근무, 강태봉, 최석진, 송보경 등을 강사로 지역교실을 운영하여 농민의 의식화를 추진하였으며 1975년경에는 해남YMCA농촌개발연구회를 조직하고 기장교회를 중심으로 신협을 창설하고 1978년에는 해남최초의 양곡조합을 연맹의 지원과 개발회원들의 출자로 삼산면 감당리에 설립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될 내용이 있다. 김남주, 황석영, 정광훈이 1970년대에 해남농민 조직화운동을 했다는 내용이 김남주에 관한 기록이나 정광훈의 약력에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시거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1970년대에 해남에서 농민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당시 그들과 교류했거나 관련 있던 사람들에게 확인한 결과를 필자가 정리하여 여러분의 질정을 받고자 한다.

이 시기에 함성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집에서 요양하고 있던 김남주와 해남 수성리에 가옥을 구입하여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있던 황석영이 가끔 Y에 드나들었고 지역인사들과 어울렸지만 출감하여 경찰의 주시를 받던 김남주나 역시 정보기관의 요주의대상이었을지도 모르는 황석영의 입장에서 농민조직화운동을 할 형편이 아니었으며 해남Y와 연결되지 않은 독자적인 농민조직화운동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당시 주위사람들의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광훈의 경우도 1970년대 해남읍이 TV난시청지역임을 이유로 모인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자 해남YMCA가 정광훈으로 하여금 금강산에 중계탑을 설치하게 하여 그로 인하여 전파관리법 위반으로 고발까지 당하였다.

정광훈은 당시 모 TV 대리점에 전자제품 수리일을 하였고 해남Y의 이사였다.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은 옥천에 살고 있을 때 4-H운동과 이,동 농협설립에 관여하였다는 주위사람들의 증언으로 확인 할 수 있지만 직업상 형편으로나 해남Y와의 관계 등을 고려 할 때 1978년 6월 무안군 해제면 해제중앙교회에서 전남기독교 농민회가 창립되기 전까지는 독자적인 농민운동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일관된 증언을 바탕으로 명확히 정리하니 이제는 더 이상의 논란이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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