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도와했던 작업 평생 직업
35년동안 한 자리에서 묵묵히 일
돌아가신 아버지 아직도 찾아
10곳 넘던 표구사 이젠 2곳 남아

▲ 고. 김두만 선생.
▲ 고. 김두만 선생.

번창했던 표구 문화 이제는 찾는 사람만 찾아

예술이 번창하던 시절, 해남에서 표구사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지금 해남읍에는 2곳의 표구사가 남아있다. 그 중 하나인 대림표구사는 아버지가 집에서 그림, 서예 등 작품들을 표구하던 것을 돕던 아들이 직접 표구사를 차리고 어깨너머로 배웠던 기술을 갈고 닦아 35년이라는 세월동안 표구사를 운영해오고 있다.

대림표구사는 지난 1980년에 문을 연 자리에서 꾸준히 운영되고 있다. 대림표구사의 주인은 김홍(65)씨로 한문학자인 고 창강 김두만(1909~2001)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김 씨는 학창시절 종종 집에서 표구작업을 하던 아버지를 도와드렸다. 김두만 선생은 자신이 쓴 서예작품이나 지인들의 작품을 표구했었다.

"내가 청소년기때 아버지가 10년정도 집에서 표구를 했었다. 방과 후에 아버지랑 함께 액자 틀도 깎고 비단도 붙이면서 조금씩 도왔던 것이 처음 표구를 접한거다"

그렇게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에게 표구를 배운 뒤 김 씨는 군대를 전역하고 학교에서 서무일을 보며 살았다. 5년간 학교에서 일하다가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 적성에 맡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것저것 다른 일을 찾다가 아는 작가 한 명이 어렸을 때 아버지따라 표구를 해봤으니 표구일을 시작해보라는 권유에 대림표구사를 차렸다.

"그때 당시 해남읍에 표구사가 9곳이 있었다. 표구를 원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었던 때였다. 어렸을 때 해봤던 것이 있으니 겁 없이 도전했던 거였다. 표구사를 차리면서 크게 숲을 이루라는 뜻으로 대림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3년간은 고생했다"

김 씨가 30살에 대림표구사를 열었을 당시에는 대흥사를 비롯해 해남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 글 쓰는 사람 등 많은 예술가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작품은 당연히 표구해서 소장하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절이었다.

"점차 일이 들어오고 10년간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특히 명절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쉴 틈이 없었다. 그 때는 표구한 작품을 선물로 주고받던 일이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가 표구사에서 직접 일을 하신 것은 아니지만 도움을 많이 줬다"

김두만 선생이 표구사를 지나가면 김 씨는 아버지를 불러 표구 의뢰 들어온 작품의 해석을 부탁하면 그 자리에서 척척 해석해주곤 했다고 한다. 혹여 모르는 한문이 나와도 중국한자사전까지 찾아보시며 해석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표구사를 찾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지금도 간혹 아버지에 대해 묻는 손님들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덕택에 지금까지 표구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표구는 하향산업으로 접어들면서 해남읍에 있던 표구사들도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점점 손님을 줄어들었지만 김 씨는 표구를 시작하고 나서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표구하는 일이 좋았고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은 것이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표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고 신경 쓰이는 작업이 배접하는 일이다. 배접을 마친 그림이나 글씨를 액자, 병풍 등에 바르고 말리고 다시 비단을 입히는 반복 작업이 끝나면 표구는 완성된다. 표구는 작품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만큼 큰 공을 들이면서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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