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순(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6월 2일자 미국의 뉴욕 타임즈 신문에는 '실리콘 밸리가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What Silicon Valley Can Learn From Seoul)'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핵심은 미국의 디지털 산업이 한국에 비해 크게 뒤쳐져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디지털 산업을 앞장서 이끌어 가는 미국이지만, 미국보다 4-5년 앞서 가고 있는 한국으로부터 배울게 많다는 것이 기사의 핵심 내용이었다. 뉴욕 타임즈 기자는 카카오톡과 같은 서비스를 예로 들면서, SNS는 물론이고 소비생활과 금융거래에서 디지털 서비스 이용이 일반화 되어 있는 한국을 부러워했다.

미국 실리콘 밸리가 배워야 할 정도로 한국 사회의 디지털 네트워크는 잘 작동하고 있지만, 위기관리 능력이나 의사소통 수준은 에볼라 바이러스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후진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동호흡기 증후군 즉 메르스(MERS) 바이러스 확산에 대응하는 정부 지도자들의 태도를 보면 확연하다. 국가적 위기를 당면한 상황에서 디지털 첨단 기술을 활용해 국민들에게 신속하게 알리고 대처하기 보다는, 감염 병원과 감염 지역을 은폐함으로써 국민들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정부가 숨긴 정보는 국민들 사이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전파되었고, 진실과 오류가 뒤섞인 정보는 국민들로 하여금 합리적 판단을 하기 어렵게 했다. 결국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 국민의 불안과 불편은 물론이고 경제적 손실과 고통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무선네트워크를 갖추었고, 가장 높은 스마트폰 보급률을 자랑하는 디지털 선진국이지만, 한국의 위기관리 능력은 그 어느 후진국만도 못한 실정이다. 최근의 메르스 사태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진실만큼 효과적인 대책은 없고, 거짓과 은폐만큼 부실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유언비어는 엄단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지난 밤 제자로부터 카톡 문자가 날라왔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간 중국인 제자가 메르스 때문에 걱정된다며 안부를 물어왔다. 명절 때면 잊지 않고 안부를 전해주는 고마운 제자이긴 하지만, 이번 안부 문자는 반갑지가 않았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제자들과 언제나 연결할 수 있는 첨단 국가에 살지만, 바이러스 공포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현실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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