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한 달 만에 군에 입대 여든에도 인터넷 뱅킹까지

나는 음력으로 1932년 4월 2일에 인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다. 여섯 살에 밀양 박씨인 어머니의 친정인 해남으로 내려와 지금까지 살았다. 학교라고는 중학교 3학년까지만 다녔고 졸업장은 못 받았다.

자라면서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전혀 말을 안 해줘서 반항을 많이 했다. 나중에 자란 후에 아버지에 대해 찾아 나섰더니 이곳에서 태어난 어머니가 유모 생활을 하셨는데 인천까지 올라갔다가 나와 동생 형제를 나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임시로 해남에 내려가 있으라고 하고 다달이 용돈도 보내준 모양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숨기셨는데 철없이 불효자 노릇을 많이 했다. 해방 후에 한번 만난 후 소식불통이 돼 버렸다. 물론 용돈도 보내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친정 밭에 오두막집을 짓고 그저 근근이 생활했다. 작은외숙이 작고하시고 손이 없어서 전답 600평짜리를 소작한 것이 유일한 농사였으니 어머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97세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2살 차이인 남동생은 19살 때 1년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 번 돈으로 여비를 해 서울로 갔다. 친구 소개로 재봉일을 배워 양복점에서 근무했다, 그래도 서울에서 밥먹고 살다가 3년 전에 나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집에 전답이 없으니 어머니와 우리 두 형제는 날품팔이도 하고 어머니 친정에서 준 전답 몇마지기로 겨우 먹고 살았다.

 

 

 결혼사진
 결혼사진

 

  군 복무 시절 남동생과 함께
  군 복무 시절 남동생과 함께


전답이 없어 날품팔이로 연명

19세때 6·25가 발발하자 여자들 빼고 남자들은 궐기대회인가 뭔가를 갖고 식량보따리 싸서 짊어지고 부산까지 간다고 했다가 강진까지 갔다 온 기억이 있다. 다행히 호적이 2년 늦게 돼서 군대에 잡혀가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을에 배운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난리통에도 조용했던 것 같다. 다른 마을에는 배운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한다며 지주들을 해코지하고 서로서로 싸웠다고 들었다.

그래도 6·25때 아버지 자식들이 이곳으로 피난와서 뿌리를 찾은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23살 때 문내 학동에 사는 동갑내기인 경주 김씨 김재엽과 결혼했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결혼 예복을 못 사고 남의 옷을 빌리고 구두까지 빌려 신었다.

중매로 결혼했으며 사람들은 내 아내를 학동댁이라 불렀다. 결혼 한 달 만에 영장 받고 군대에 입대했다. 눈이 좋지 않아서 빠질 수도 있었는데 그냥 잡혀갔다.

그 시절에는 돈이 많든지, 빽이 있었다면 군대에 안 갔을텐데 눈이 많이 안 좋아도 군대에 갔다.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공병부대에서 근무했다. 그 당시 공병부대는 장비보다는 인력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몸으로 때웠다. 다행히 철교중대에 배치돼 위험하기는 했지만 편한 보직이었다. 27세때 제대했다.

제대 후 1년이 지난 28살에 첫아들을 나았다. 첫애가 안생기자 어머니하고 집안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니 첫아들 정남이가 태어날 때는 무척 기뻤다. 둘째는 딸인 정란, 셋째는 아들인 정태, 넷째는 딸 옥란이 2남2녀다. 첫째는 중학교까지 문내면에서 나오고 공부를 잘해서 고등학교는 등록금이 없어도 되는 이리공고를 졸업하고 대기업연구소에 근무한다. 현재 안양에서 살면서 1남1녀 모두 결혼시켰다. 둘째는 경기도 일산에 살면서 1남을 두었고 셋째는 소방공무원으로 안양에 거주하며 1남을 두었다. 넷째는 남양주에 살고 2남을 두었다.

못 먹고 못 입은 세월만 산 것 같다. 농번기, 농한기가 따로 없었다. 한겨울에도 악착같이 일했다. 가마니, 덕석, 소쿠리, 삼태기 등 모두 이 손으로 해결했다. 소를 키워 송아지를 팔고, 돼지도 키워서 새끼나면 팔아 애들 교육비에 보탰다.

그래도 문내면 일대에 무, 배추 등 채종사업을 할 때 돈 좀 벌었다. 악착같이 일해서 논 900평, 개간지 밭 1200평, 밭1900평, 집터 300평 정도 마련했으니 고생 많이 했다. 농기계는 김영삼 정부 때 반 값할 때 경운기 한 대 산 것이 유일하고 모든 농사일을 몸으로 해냈다.

 

 

 

 

 

  추석에 만나는 친구모임
  추석에 만나는 친구모임

 

 

   문내동공립국민학교 졸업사진
   문내동공립국민학교 졸업사진
 6·25전쟁 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집체교육 모습
 6·25전쟁 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집체교육 모습

고령 시각장애 딛고 인터넷까지

눈이 안 좋았는데 뒤늦게 2001년에 시각장애 6급 판정을 받고 복지카드를 발급 받았다. 농사일을 전혀 안하고 요즈음에는 며느리들이 다달이 용돈을 보내준다. 집사람이 74살로 세상을 떠났으니 적조하다. 그래서 배운 것이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취미로 배웠는데 아들, 손자, 손녀들하고 e메일을 주고받을 정도다. 며느리들이 보내 준 용돈도 인터넷 뱅킹으로 확인한다.

명절 때는 애들을 생각해서 안양으로 올라간다. 요즈음 말로 역귀성을 한다. 인터넷으로 기차를 예약해서 다닌다. 파워포인트, 엑셀 등 각종 프로그램 자격증도 땄다. 작년에 지역신문에도 소개됐다.

원마을에서 두 번째로 고령이다. 나이 차이는 많지만 박남석(74)씨하고 잘 어울린다. 매일 장애인복지관 정보화실에 가서 컴퓨터를 더 배우고 있다. 보조강사역할을 하고 있다. 어렸을 때 가난해서 못 배웠지만 좀 배웠다면 교사직을 해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몸 건강하고 자식들 여의고 손자, 손녀 재롱 보면서 사는 지금이 행복하다. 아내가 너무 빨리 내 곁을 떠난 것은 서운하기 그지없다. 올 설날에도 인터넷으로 직접 기차표를 예매해 안양에 다녀와야겠다.
 

정리 = 오영상 기자 desk@hnews.co.kr
육형주 기자 six@h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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