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면 충리(忠里), 충신의 고향이라서 충리인가

삼산면 충리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이유길 장수유허비. 군인의 생명인 '충의 정신'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정신을 생각하게 한다.
삼산면 충리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이유길 장수유허비. 군인의 생명인 '충의 정신'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정신을 생각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남의 나라 전쟁인데 출정 시 맹세한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하나로 목숨을 바친 우직하고 용맹무쌍한 장수가 있다. 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1576-1619)은 해남군 삼산면 충리 에서 거주하며 무예를 닦고 평안도(平安道) 영유(永柔) 현령으로 있을 때 명(明)나라의 파병 요청이 있어 강홍립(姜弘立)을 원수로 하고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부장(副將)으로 출병하였다. 함길직도(直搗)의 적 소굴을 소탕하던 중 패하여 강홍립과 김경서는 항복을 하였으나 이유길만은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분전하던 중 화살을 맞고 죽음에 이르렀다. 충리에 있는 조선조 광해군 시절 장수, 이유길의 유허비(해남군 향토유적 제1호) 앞에서 군인의 생명인 '충의 정신'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정신을 생각한다.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3국의 변화

임진왜란은 16세기말 동아시아 3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조선이었다.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지만 전쟁의 결과는 사뭇 달랐다. 조선은 전국 8도가 전장으로 변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사상적으로 봉건집권세력은 일반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내부 분열이 심해져, 해이해진 기존 질서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주자학 이념의 교조화가 더욱 심해지고 집권세력·지식인층들 사이에 명군의 원조에 대해 존화의식이 강화되어,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북벌론을 형성하게 된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등장하면서 신분위계제에 근거한 봉건지배체제를 세워나가는 한편 전쟁 중 약탈해간 활자·그림·서적 및 포로로 데려간 우수한 활자 인쇄공을 통해 성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 더욱이 조선에서 데려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문화가 크게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명나라는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모되어 재정압박이 가속되었고, 각종 봉건징세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지방의 봉건군벌들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만주에서는 명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계기로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여진족을 통일한 뒤 1616년 칸(汗)에 즉위하여 후금(後金)을 세워 명·청 교체의 기틀을 만든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후진국으로 인식되어왔던 일본과 여진족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정통을 자부해온 명과 조선이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새롭게 변화된 것이다.

아까운 장수들 충(忠) 위해 죽다

만주에서 부상한 여진족 누르하치는 후금 국을 일으키고 명나라의 세력을 꺾기 위해 계속 명을 압박해 나갔다. 이에 명은 후금토벌을 위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한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입었기 때문에 姜弘立을 5도 도원수로 하고 金京瑞를 부원수로 병사 1만 3000명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이유길은 金應河· 李一元· 李繼宗 등과 함께 원명군의 우영중군장으로 참여한다. 1618년 10월 평북 창성에서 명의 10만 대군과 합류, 승리와 패배가 여러 차례 계속되었으나, 1619년 봄에 들어 점차 후금군 숫자가 많아지자 원정군은 전멸의 위기에 놓였다. 명나라 군사는 다 죽고, 조선군사도 더 지탱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도원수(강홍립)와 부원수(김경서)는 후금 군에게 항복하였지만 좌영장 김응하와 우영장 충의공은 최종까지 싸워서온 몸에 상처를 입고 손가락이 잘려서 더 이상 활을 쏠 수도 없었다. 김응하 장군의 결사적인 항전과 화살한발 쏠 수 없이 망가진 손가락을 보면서, 이유길은 자신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에 입고 있던 한삼소매를 찢어서 '三月 四日 死'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자신이 타던 말의 갈기에 매어 주고 채찍을 쳐 보냈다. 말을 떠나보내고 난 뒤 주위를 둘러보니, 예하 3000의 병력은 거의 없어지고 군관 60여 명과 사병 몇 명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거기에다 포탄은 남은 것이 없었고, 화살·창·칼 등도 모두 소진되거나 부러진 상태였기 때문에 남은 것은 맨주먹뿐이었다. 이국 만 리 후차령이라는 곳에서 62명의 군관과 사병들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이유길 장수의 기록이다.

이유길 장수의 선산, 혈삼무덤 아래 말 무덤. '義馬塚'이란 묘지석까지 만들어 전해지고 있다.
이유길 장수의 선산, 혈삼무덤 아래 말 무덤. '義馬塚'이란 묘지석까지 만들어 전해지고 있다.
주인과 함께 명을 다한 명마스토리


한편 '三月 四日 死'란 피 묻은 한삼자락을 갈기에 맨 이유길 장수의 말은 진중을 뛰쳐나와 주인의 뜻을 알았음인지 산과 강을 건너 3일 동안을 달려 주인이 집에 도착했고 구슬피 울다 숨을 거두었다. 가족들이 죽은 말의 갈기에 메여있던 혈삼(血衫)을 찾아냈는데, 동생 되는 별좌공(휘 復吉)이 압록강까지 가서 그 혈삼에 공의 혼을 불러 와 선산(파주 광탄면 발랑리)아래 그 혈삼을 묻어서 장사 지냈다. 시체가 없는 무덤 곧 '혈삼무덤'의 주인공이 이유길 장수이며 그 충성스런 말도 혈삼무덤 아래 묻어 주고 '말 무덤'이라 불러 오다가 '義馬塚'이라는 묘지석까지 세워 후세에 전하고 있다.(延安李氏宗報 1987년 봄 호 통권 제4호)

이렇듯 애처로운 사연을 담고 있는 장수의 죽음에는 장수들이 아끼는 말에 관한 스토리가 많이 딸려 있다. 충성스런 명마(名馬)이야기는 오랜 시절 수없이 침략과 전쟁을 겪고 살아온 민족들의 공통 설화인데도 보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애잔하다.

홍성읍에 있는 금마총은 고려 말 최영장군과 얽힌 말 무덤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말은 날아가는 화살보다 빠르다'고 자랑하던 최영장군이 애마를 타고, 산 아래 은행정 쪽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동시에 애마도 힘차게 달려 나갔다. 은행정에 도착해보니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화살이 지나간 것인가. 최영은 약속대로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었다. 그 순간 화살이 피융하면서 지나갔다. 실수로 화살보다 빠른 애마를 죽인 최영장군은 말을 묻고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귀감을 삼았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권길(權吉)은 경상도상주판관으로 있었다. 상주에서 왜군과 치열한 접전을 치루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옷에 혈서로 유서를 남겼다. 혈서 묻은 옷을 물고 말은 달리고 달려서 음성군 소이면에 있는 본가에 다다르자 그만 지쳐서 죽고 말았다. 주인의 유서와 유물을 본가에 전하고 죽어간 충성스런 말을 기리기 위해 말이 쓰러진 자리에 무덤을 만들고 후손들이 해마다 벌초까지 해오고 있다.

전남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구상마을에 전해지는 말 무덤 역시 임진왜란으로 큰 공을 세운 장수 황대중이 정유재란 남원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자 가장 아끼던 말이 눈물을 흘리며 장군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이를 본 김완 장군이 시신을 수습해 말에 태우자 말은 300리 길을 달려 장군의 고향에 이르렀다. 이후 말은 먹을 것을 거부하다가 장군의 장례가 끝나고 3일후에 죽었다고 한다. 강진에 있는 의마총이야기다.

전국에 있는 명마스토리를 함께 묶어 말 육성산업과 연계시키면 어떨까. 그 때를 대비하여 해남군도 이유길 장수의 유허비가 있는 사당 주변에 그의 명마와 혈삼스토리를 재생하는 기념물을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이유길 장수와 그의 가족에게 내린 포전교지. 충을 중요시한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이유길 장수와 그의 가족에게 내린 포전교지. 충을 중요시한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된 25점의 연안이씨 가전 유물은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이유길과 그 가족에 주어진 포전(褒典)내용의 교지(敎旨, 그리고 부조 묘를 받들고 있는 자손들에게 특별 대우하는 은전(恩典) 등에 관한 고문서다. 가문에 충신이 하나 나오면 후손대대로 복을 주어 왕조의 기틀을 단단히 하려 했던 당시의 상황을 엿보게 한다.

연안 이 씨들이 충의의 사표로 삼고 있는 이유길은 조선조의 청백리로 녹선 된 이후백(李後白)의 손자로서, 아버지 이선경(李善慶)이 왜적에 항거하다 분사하자 복수할 생각으로 18세 때 이충무공 휘하에 들어가 충무공을 따라 명량대첩에서 공을 세워 9품직을 제수 받았다. 이후 명나라에서 금의 침입으로 원병을 청했을 때 우영장(右營將)으로 출전하여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순조 대에 이르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錄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가 증직되었으며,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용정사(龍井祠)에는 이충무공과 함께 배향되어 있으며 연안 이 씨 8명의 상신(相臣)과 7명의 대제학(大提學), 6명의 청백리(淸白吏), 그리고 조선조의 문과급제자가 250명이나 된다.
 

(김원자 호남대 외래교수, 본지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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