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신화 속으로 걸어들어 간 해방시인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출생. 5남 3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1975년 '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 실락원 기행' ' 초혼제' '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여성해방 출사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등 10권의 시집을 발표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다.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출생. 5남 3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1975년 '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 실락원 기행' ' 초혼제' '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여성해방 출사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등 10권의 시집을 발표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다.

삶 자체가 문화콘텐츠인 사람들이 있다. 문화콘텐츠는 식상함이 부각되는 순간 생명력을 잃게 되므로 콘텐츠를 살리는 데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이름만 들어도 이야기가 따라 나오고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하는 사람. 나는 몇 안 되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로 고정희 시인을 꼽는다.

그가 여류시인이고, 독신자로 살다 지리산 등반 중 급류에 휩쓸려 극적인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 외에도 사후 짧은 시간에 고정희 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삶을 조명하고 죽음을 추모하는 이가 흔치 않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1948년에 태어나 91년 사망, 43세를 일기로 아쉽게 세상을 떠난 시인은 비록 세대가 다르지만 프랑스의 요절여성철학자 시몬느 베이유를 상기시킨다. 철학 교수 자격 학위를 받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 노동자가 된 유대인 여자, 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는 등 자신의 사상을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 헌신한 그녀는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침으로 역사와 신화가 되었다.

고정희시인 21주기를 맞아 고향 해남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추모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가 시와 삶을 통해 드러낸 여성운동, 민중운동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누구라도 역사와 삶에 대한 성찰을 얻을 것이다.

왜 고 시인의 죽음이 안타까운가?

벌써 21년이 흘렀다. 1991년 6월 9일 일요일, 아침부터 내린 비 때문에 뱀사골 골짜기물이 불어있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건넜다 위험을 감지하고 다시 되돌아오면서 생긴 사고사였다.

그의 죽음소식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 역시 그날 사경을 헤매는 직장 상사의 병문안을 갔다가 그곳에 모인 문인들에게 전해 온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환자분은 그 후 병환에서 회복돼 몇 년을 더 활동하시다 돌아가신 시인 최하림씨였고 자신들보다 어린 고정희 시인의 사고소식을 들은 동료문인들의 황망해하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정희 시인의 사고현장과 장례식장을 직접 다녀온 '또 하나의 문화' 동인 김은실씨의 기록을 보면 "광주에서는 고정희 선생이 추구했던 새로운 실천으로서의 여성주의는 하나의 바람이고 외도로 취급하는 듯했고…"라고 나온다. 고인의 삶과 겉돌았던 장례식의 풍경을 보면서 생애의 많은 부분을 보냈던 광주와 동료문인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이해받지 못한 시인의 죽음을 안타깝게 표현한 것이다.

고정희 시인이 생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심지어는 가장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아마도 그의 결벽주의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여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머스마'들에 치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기집아'들에 치이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누구보다 무겁게 십자가를 지고 살았던 시인"이라고 그의 친구 조혜정씨(사회학자, 연세대교수)는 말했다.

고정희 시인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그가 한창 일을 해야 할 나이에 필리핀에서 막 돌아와 '여성해방출사표'를 쓰고, 이제 본격적으로 민중이든, 여성이든 해방운동의 중심에 서야할 시점에 홀연히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시간이 길어야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생애 동안에 천수를 다한 사람보다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고정희의 43년이 그런 것이었다.

고정희라는 인물이 갖는 아이콘

고정희 시인은 살아있는 동안에 10권의 시집을 내었다. 31세에 공식적으로 등단하여 12년 동안 10권의 시집을 내었으니 치열하게 많은 시를 쓴 셈이다.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단정한 글씨로 써내려간 그의 시편들은 시에 헌신한 수도자의 모습과 같다. 그의 방에 걸려져 있던(지금도 생가에 보존) 작은 나무현판의 '고행, 청빈, 묵상'이란 세 단어는 그의 삶과 문학에 임하는 자세를 잘 보여준다.

시를 쓰는 한편 광주 YWCA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 법률 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사회활동과 직업전선에 참여하기도 하며 특히 1980년대 초부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정희 시인을 이야기할 때 이 모든 활동에 앞서 언급할 것은 시인으로서 그가 이룬 업적일 것이다. 시인 나희덕은 "고정희는 서정시의 좁은 틀을 과감하게 부수고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부단히 탐구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 금기시되던 시적 언술들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선구적 역할을 인정받기에 충분했다"고 하며 "고정희가 없었다면 한국문학사에 페미니즘이라는 중요한 인식의 장은 훨씬 더 늦게 열렸을 것이다"고 말한다.

한국 문학사에서 고정희 이전에 '여성의 경험'과 '여성의 역사성' 그리고 '여성과 사회가 맺는 관계방식'을 특별한 문학적 가치로 강조하고 이론화한 작가는 아무도 없었다.

초기 시,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상실현을 꿈꾸는 희망찬 노래에서부터 민족민중문학에 대한 치열한 모색, 그리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탐구는 한국문학사에 남을 귀중한 자산이다. 시인으로서, 여성운동가로서의 고정희의 실천적 삶은 이제 역사와 신화가 되었고 이 땅을 살아가는 소녀들의 전범이 되고 있다. 매년 고정희 시인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리고 여기에 모여드는 청소년들의 관심이 높아가는 걸 보면 고정희라는 아이콘이 발신하는 메시지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해남은 그녀를 더 사랑해야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그의 유고시처럼『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그의 여백에 많은 여성들이 지금 새로운 여성해방공동체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올해도 '해남여성의소리'와 '고정희기념사업회'가 시인의 생가와 미황사 및 해남문화원 일원에서 뜻 깊은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고향에서 오히려 낯설게 대하는 인물들이 있다. 평소에 성격적으로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모가 났던 사람의 경우 그렇다.

김남주 시인의 애창곡이 '돌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고향'이었다면 고정희의 애창곡은 양희은의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이었다고 한다. 얼마 전 해남신문 SNS포토를 통해서, 또 인터넷 댓글을 통해서 고정희 생가 표지판의 경력에 오자가 있다는 문구를 보았는데 작은 것 하나라도 고인의 생애와 무관한 오류가 없는지, 추모행사가 의례적인 연중 행사로 그치고 마는지 꼭 살펴야 할 것이다.

글 서두에서 밝힌 대로 '문화콘텐츠는 식상함이 부각되는 순간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 해남이 낳은 빼어난 여성시인의 삶과 문학을 더욱 사랑하고 그의 삶을 체화할 수 있는 지속적인 강좌마련 등 문화콘텐츠로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원자(호남대 외래교수, 본지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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