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삶 마친 조선의 마르코폴로 '최부(崔溥)'
처가 따라 해남 행, 어초은 윤효정 등 해남육현 길러내
표해록, 고전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5C 말 중국 문물 연구의 보고

풍랑에 맞서서는 승리했으나 사약으로 마감해야 했던 최부의 삶은 드라마틱 하면서도 극적이다. 사진은 그의 신위가 모셔져있는 해남 해촌사.
풍랑에 맞서서는 승리했으나 사약으로 마감해야 했던 최부의 삶은 드라마틱 하면서도 극적이다. 사진은 그의 신위가 모셔져있는 해남 해촌사.

조선 성종 19년(1488년) 정월 그믐 날, 제주도에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던 조정의 관료 한 사람이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전라도 나주로 초상을 치르러 가기 위해 급히 배를 띄웠다. 그런데 군관, 향리, 관노 등 모두 43명이 탄 배는 추자도 근처에서 태풍을 만났다. 10여일을 강풍과 폭우 속에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 강남의 절강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하였다.

살았다고 환호를 한 순간 고난이 또 닥쳐왔다. 왜구로 몰린 것이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황에서 필담으로 조선의 역사와 인물, 예의범절 등 여러 이야기를 잘하여 그들은 혐의를 벗는다. 그리고 중국 관리와 군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항주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이른다. 북경에서 그들은 황제를 알현한다. 이후 이들은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귀환한다. 제주도를 떠난 지 6개월 만에 8천 여리의 험난한 길을 돌아온 것이다.

성종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총책임자인 관료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그는 그동안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8일 동안에 써서 임금에게 바쳤다. 이 책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다. 저자는 최부(단종 2년 1454- 연산군 10년 1504).

'땅 끝 해남의 인물자원'은 바로 이 최부로부터 시작한다. 원래 해남출신은 아니었다. 1454년 나주군 동강면 성지촌에서 진사 최택의 아들로 태어나 자(字)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다. 아버지의 고향 금성과 어머니의 고향 해남에서 한 글자 씩 따와 호를 지었다고 한다.

표해록의 역사적 가치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중국 3대 기행문으로 손꼽히며 한국고전 기행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표해록'의 저자가 일찍이 해남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오늘 해남의 인물자원을 조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하나의 지표가 된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라고 하면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가로 중국 원나라를 여행하여 동양의 사정을 서양에 소개한 인물. 최부에게 '마르코 폴로'라는 수사가 붙은 것은 그가 마르코 폴로를 능가하는 훌륭한 중국 견문록을 지었기 때문이다. '표해록'에는 최부 일행의 표류와 여정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고 있어,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 바다의 정황 그리고 중국 내 운하와 그 주변의 풍광 등이 묘사되었다. 학자들은 표해록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보다 못할 것이 없으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1299)보다도,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9세기)보다도 가치를 높게 본다.정해진 루트를 통해서만 중국을 왕래했던 당시에 최부의 기행루트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마치 낯선 소인국에 떨어진 걸리버처럼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겪어야 했던 이들의 여정은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일행 43명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윤달 정월 3일 제주를 떠나 같은 달 17일 이국땅에 오르기까지 망망대해에서 추위와 굶주림, 공포에 시달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과 귀국까지의 여정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또한 최부의 관찰력은 예리했다. 오가는 길에 본 주변 상황을 통찰하는 안목이 있었다. 표해록을 고전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5세기 말 중국 문물 연구의 보고라고 하는 것은 환관의 정치참여나 명 왕조의 비(非)유교문화에 대한 비판, 사회적 명분질서의 혼란에 대한 비판 등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중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견문기에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찍이 고병익 고 서울대 총장은 표해록이 갖는 가치를 다음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문학적 가치로, 표류하다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이기도 하지만 저자 최부의 문필력으로 인해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점. 둘째는 정신사적 가치로 역경 속에서도 조선의 선비와 관리로서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한 점, 특히 중국 측과의 교섭과정에서 관복을 입지 않고 상복을 고집하며 우리의 법도를 따른 점. 셋째는 사료적 가치로 당시 중국의 남부는 조선의 관리가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땅으로 그 곳의 습속과 자연은 당시 중국 연구사료로 큰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

호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

해남의 입장에서 보면 금남 최부의 가치는 그의 문필가로서의 역할보다 더 큰 것이 있다. 즉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삶이다. 그가 나주에서 언제 해남으로 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처가가 해남이어서 어렸을 때 왔을 것으로 본다. 당시 해남에서 유력한 토착세력이었던 해남정씨는 15세기 이후 관직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인근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들과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신분을 높여가고 있었다. 해남정씨와 혼인 한 대표적인 성씨가 나주인 금남 최부(탐진), 영암인 임수(선산), 이속가, 강진인 윤효정(해남), 진도인 민중건(여흥) 등 5 가문이다.

해남정씨는 금강동(현 해리)에서 살았는데 해남정씨와 통혼한 5가문도 모두 금강동에 자리 잡아 이후 금강동은 해남 사족들과 학문의 중심지로 부각된다. 최부는 이곳에 와서 '관서재'를 열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금남을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고 했다. 첫째는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큰 명성을 얻었던 유성춘(柳成春)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이었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다.

윤효정은 윤행(尹行)·윤구(尹衢)·윤복(尹復) 등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리던 고관들이었고, 후손으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는 명문의 학문가를 이룩했다. 석천 임억령의 형제들 또한 조선의 명사들이 많았고 호남문단에 석천이 미친 영향 또한 대단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유성춘·유희춘 형제는 금남의 외손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금남의 사위에는 나주 나 씨의 나질이 또 있다. 나질의 아들 나사침은 현감을 지냈는데 금남의 외손자다. 금호는 나덕명(羅德明)…나덕헌(羅德憲)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모두 금남의 외 증손들이면서 이른바 '육룡(六龍)'이라는 별호를 들을 정도로 명망이 큰 문사들이었다. 그들이 해남 뿐 아니라 호남일대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금남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바로 호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최부 콘텐츠가치, 재조명돼야

자료에 의하면 금남이 자리 잡고 살았던 곳은 해남읍 해리, 그리고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에 귀양살이 후, 다시 갑자사화를 맞아 참수형을 받았을 때 그의 가족은 마산면 버드나무 골(현 상등리)에서 살았으며 최부의 무덤도 그곳에 있다가 1970년대에 나주(행정구역은 몽탄)로 옮겨졌다. 묘지는 가족묘 형태로 묘소를 알리는 이정표와 관광안내 표지판 외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최부의 고향 나주시는 정작 해남에서 이장해 오긴 했으나 행정구역상으로는 무안군에 무덤관리를 넘겨주고 있는 셈이다.

조선 초 해남 관두량(현 화산면 관동리)과 영암 이진포(현 북평면 이진리)는 제주로 향하는 대표적인 포구였다. 최부의 표해록에서도 관두량에서 제주가는 배를 타기 위해 40~50일 정도 바람을 기다렸으며 배를 타고 이틀 만에 제주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있다. 관두산 아래 관두량은 제주로 부임하는 목사나 임금의 사신, 제주 등 인근 섬으로 귀양 가는 사람들,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주 항구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중국으로 향하는 국제항의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해남엔 최부와 관련된 문화원형들이 산재해 있다. 로빈슨크루소에 버금가는 고전명작을 낳고 호남정신의 개산조인 최부의 삶은 현대인들의 정서에 맞게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모차르트는 그의 고향 잘츠부르크는 물론 피아노협주곡 제21번(일명 엘비라 마디간)이 연주되었던 곳, 미망인 콘스탄체가 살았던 집,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는 피가로하우스, 심지어는 콘스탄체의 어머니가 하숙을 치던 집까지도 다 관광명소로 만들어놓고 있지 않은가?

역경 속에서도 운명과 맞서 승리를 하고, 또 좌절한 한 많은 사나이 최부의 삶은 드라마틱하면서도 극적이다. 미암의 말처럼 어둠속에서 밖으로 나와 세상에 널리 전해지길 기다리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해촌사나 광주 무양서원 사당 한켠에 최부를 가둬둘 일이 아니다.

김원자(호남대 외래교수, 본지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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