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온양방씨 두선
계곡면 성진리 신성마을

신발 짜서 내다 팔며 시묘살이
영조임금 명에 따라 정려비 세워

공의 휘는 두선이요, 성은 방씨이며 본관은 온양이다. 대군의 학사였던 월봉선생 후손인 선비 사영의 아들이다. 두선의 효성은 하늘에 뿌리를 두었는지 어려서부터 그저 부모의 귀중함만을 알았지 자신의 사사로움은 알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일찍이 부친상을 당해 예의에 따라 장례를 마쳤다. 두선은 편모를 받들기 위해 소금을 지고 행상을 하며 조석의 식사를 이어나갔다. 어른이 돼 장가를 들었는데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자, 그 아내를 내쳐 어머니의 뜻에 순종했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밤낮으로 옆에서 간호하며 온갖 처방을 다했으며 장례를 치를 적에 울고 가슴을 치는 절도와 장례를 갖춤에 유감이 없었다. 3년 동안 여막을 지키며 신발을 짜서 내다 팔아 조석의 제사상을 거르지 않아 이웃 사람들이 이를 칭찬했다.
조선 영조때 사람인 어사 원경하(元景夏)가 별단(別單)으로 포상을 청했으며 전라감사 이주진(李周鎭)이 장계를 올렸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조윤성(曺允成)이 아뢰니 그 장계에 따라 행사하라는 비답이 내려, 건륭(乾隆) 4년(1739)6월 초사일에 특별히 도설(棹楔)의 은전을 입어 정려(旌閭)가 세워지게 됐다. 세월이 오래다 보니 무너졌고 그때그때 개수하였으니 또 비바람에 뽑힌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제 다시 무너지려 하니 새터에 누각을 세웠다. 개수할때마다 매번 문중에서 일을 맡았는데 이번 비석은 장흥 문중에서 담당했다. 장흥문중은 말하길 우리 후손들은 서로 권하고 경계하며 선조를 받드는 일은 한결같이 남쪽 족인들의 성의와 같다면 한미한 가문에 작은 보탬이 있을 수 있다 했다.

<계곡면 성진 신성마을에 세워진 방두선 정려비.>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