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원형 찾아 고대사 연구 평생 바쳐

"윤내현교수님을 아십니까?"
"네, 역사학자 윤 교수님이요? 고조선과 단군에 대해 연구하신..."
"그렇죠. 고조선을 신화가 아닌 역사로 복원하는데 크나큰 힘을 발휘하신 분이 윤내현 교수님이죠. 윤 교수님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린 아직도 고조선은 한반도에 있었고, 그 건국도 기원전 700년경이라는 설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중국이 동북공정이다 뭐다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데 우리고대사가 여지없이 중국에 묻힐 뻔 했군요."
"윤내현교수님은 대고조선설, 대륙백제설, 열국설 등 많은 설들의 문헌적 증거를 찾아낸 분이기도 합니다. 학문적 성과가 대단하시죠. 그런데 그 분이 전남 해남출신이란 것도 아세요?" "아, 그런가요? 그건 몰랐는데요. 역시 좋은 고장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오는군요. 얼마 전 열반하신 법정스님도 해남출신이죠?"
최근에 한 지인과 나눈 대화다. 신문에 해남출신 출향인사 인터뷰를 싣기로 하고 찾아 본 인물 중에 윤내현교수님(71)은 의외로 고향사람사이에서 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조용한 목소리로, 오로지 아무도 건드리려하지 않던 우리 고대사연구에 한 평생을 보내고, 지금은 평생 재직하신 대학에서도 은퇴해 집필에만 몰두하고 계시는 윤교수님을 지난 주말 서울 시청부근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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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교수님의 업적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서울에서 쭉 활동해 오신 까닭에 직접 뵙기는 처음입니다. 고향 해남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하하, 내 고향은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예요. 흰백字, 포구포字, 白浦理...그보다 공재선생의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하면 더 잘 알까? 백포리, 옛 백방포(백포)는 백방산, 망부산 등 전설이 살아 있는 곳으로 백포 들머리 신방리 연방죽의 그림 같은 풍경이 유명하지요."



"아,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시인의 후손이시군요"

"공재(恭齎) 尹斗緖께서 9대조 할아버지가 되지요. 그 분이 고산의 증손자이시니까 孤山은 나한테는 12대조 할아버지가 되시고... 또 고향마을에는 집안 형님되시는 크라운제과 창업주 윤태현회장의 생가도 있고 백포리는 해남윤씨 자손들이 대대로 한 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지요."



"'크라운 산도'로 유명한 크라운 제과 창업주 윤태현회장님은 작고하시기 전에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만, 사업가라기보다 과자만드는 장인이셨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요. 형님은 평소에 '내 자식이 먹을 수 있는 과자를 고객에게 제공한다.'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병상에서도 과자샘플을 두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셨죠. 그게 오늘 날 크라운이라는 장수기업의 원동력이 된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교수님께서 어떻게 역사공부를 하게 되셨는지, 그 중에서도 고대사연구에 빠져들게 되신 연유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시려고 작정하신 겁니까"

"천만예요. 나는 과학자가 되려고 했어요. 고향에서 현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때 목포로 갔는데, 자녀들 교육 때문에 목포로 이사해 사업을 벌이신 선친께서 그만 사업에 실패를 하는 바람에 아무래도 대학을 못갈 것 같아 목포공고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내가 평소에 존경해마지 않던 아인슈타인박사의 『아인슈타인, 나의 세계관』이란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분이 생전에 유엔에서 한 연설 중 외교관이나 정치인들에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해 하소연을 하는 대목이 있었지요. 어린 마음에 '과학자가 이래서 되겠는가'하는 실망이 오더군요. 과학자도 자신의 연구에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차라리 철학이나 역사를 공부하자' 이렇게 다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에 접근하려던 한 청년을 역사쪽으로 밀어내 버렸군요. 덕분에 우리에겐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장이 열린 셈이고…"

"1960년대에 동양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당연히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사였지 한국사는 생각지도 않았지요. 그런데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던 중 자연스럽게 갑골문을 접하게 된 거예요. 당시 국내에서는 갑골문을 봤다는 사람도 드물 만큼 자료가 없어 어렵게 자료를 모아 논문을 썼지요. 석사논문 제목이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이었는데 교수님들이 내친김에 박사학위논문까지 쓰라고 권유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쓴 박사논문이 '상왕조사 연구-갑골문을 중심으로'였지요. 그런데 '선배교수들 중에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없는데 몇 년 후에 제출하면 어떤가'라는 말도 있었고 '우선 심사나해보자'라고도 했는데, 당시 논문심사를 하신 동양사학회 원로 교수님들이 '정말 갑골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느냐'고 질문들을 해요. 당시 빈약했던 학계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지요. 학위심사가 끝나고 집에 오니 장충식 총장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저녁 늦게 총장님댁으로 찾아가 뵈었는데 대뜸 발령장을 만들어놓았다고 학교에 남아있으라는 거예요. 갑골문이라는 특이한 분야가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는 한국 고대사가 아닌 중국의 역사연구에 몰두해 계셨군요"

"학위는 받았으나 연구가 너무나 부족해서 1년 후에 결국 하버드대로 갔습니다. 거기서 세계적인 인류학자인 K.C. 장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교수를 만난 게 행운이었어요. 당시 중국과의 국교가 이뤄지지 않아 학술교류도 무척 어려웠던 때였는데 그 분의 도움으로 홍콩의 용문서점을 통해 중요한 자료들을 구하고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중국 자료들은 다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중국의 근현대사까지 다 공부하려고 했는데 고대사만도 너무 자료가 많은 거예요. 복사한 것이 상자로 60박스나 되었지요. 그 자료들을 기반으로 쓴 책이 '중국의 원시시대'라는 책입니다. 이후 기자가 실존인물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중국에서 기자가 와서 우리를 지배했다 해서 자존심 상한다고 뺀 것인데 역사연구는 정확히 실체를 규명해야지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요. 나는 그 때 한국사를 정리할 여력이 없었고 단지 문제만 지적해 다른 학자들이 더 연구하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주위상황이 내 뜻대로 가게 놔두지를 않더군요."



"그러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우리 고대사연구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셨다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1982년에 앞의 내용을 중심으로 '기자신론'이란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어요. 내가 중국의 사서와 갑골문의 연구로 밝힌 기자는 '상(商)나라 즉 은나라 왕실의 후예로 기(箕)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였으나 상나라가 서주 무왕에 의해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한 사람이라는 것,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아닌 국경 근처 변방으로 기자는 그곳의 제후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지요. 즉 단군조선은 기자를 예우하여 은나라와 동일하게 제후로 봉하여 단군조선의 변경인 국경 지역을 맡게 한 것이고 기자가 다스린 고조선의 변경은 지금의 베이징 옆인 갈석산과 난하일대라고 한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갈석산 동쪽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모두 고조선 땅이 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지요."



"논문에 대한 학계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부족집단 정도로 인식해온 국내 사학계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고조선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죠. 더구나 중국사전공의 젊은 학자에게 권위가 침탈된 것으로 생각하고 적대감을 보였는데 1984년 무역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논문발표회 때 대선배 교수 한 분은 노골적으로 책상을 치면서 '영토만 넓으면 좋은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내시더군요. 폐쇄적이고 학연ㆍ지연의 벽이 높은 학계에 비해 오히려 언론이나 일반 국민의 관심은 컸습니다. 동아일보의 김중배논설위원이 횡설수설에서 나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다뤄주었고 며칠 후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화가 왔어요. 문화부장과 셋이서 점심을 먹으면서 '민족의 고향, 고조선을 가다'란 특집을 기획해 두 달동안 연재를 하기도 했지요."



"그동안의 일반적 통설과 다른, 교수님이 주장하신 고조선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요약하긴 어려운데 우선 고조선은 실제로 있었는가? 그 연대와 위치는 어떠하며 인근에 있던 중국과의 관계, 체제 등에 관한 것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신화라고 생각하는 단군왕검과 고조선이야기가 신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조선은 2000년 가까이 존재한 나라로 봅니다. 문헌적 기록뿐만 아니라 중국 랴오닝성의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청동기는 방사성탄소 실험결과 기원전 2400년 정도의 것으로 판명돼 단군조선의 실재 가능성을 확인시켰지요."



"워낙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가시다보니 대학강단에 계시면서도 비정통역사학자니, 국수주의자니 하는 오해도 많이 받으셨죠"

"한때 '북한학설을 따르는 자'라는 오해도 받았고 거꾸로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면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학자로 매도당하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러나 최근에 고대사 특강에 청중이 몰리고 '고조선 제대로 알기' 열풍이 부는 걸 보면 그동안 외롭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무엇이며 우리가 수천년 전 고대사를 연구하는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라기보다 그 사건 속에서 정신과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우리는 '홍익인간'을 주창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분이 다르면 같이 하지 않는 중국과 달리 우리민족들은 남녀노소 차별없이 연일 먹고 마시고 가무를 즐겼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불교·유교처럼 지배계층의 이념으로 작용한 외래문화가 유입되기 전의, 온전한 민족 원형은 고조선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대사는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고 역사학의 뿌리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고대사 연구가 무척 취약하다는 게 큰 문제지요. 망실된 우리 문화의 원형을 고대사를 통해 되찾아 이를 후대에게 바로 가르치는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곡된 역사기술을 바로잡기 위해 자료더미 속에 묻혀 사시고 새 학설을 발표할 때마다 쏟아진 모함과 의혹의 눈길을 감내하며 묵묵히 연구와 저술작업에 매진해 오신 교수님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작년말로 고조선학회 회장 일을 넘기고 공식적인 활동은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학자들이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그동안 책에서 이해가 잘 안됐던 부분을 보완하고 쓰는 작업을 계속해야지요. 또 나이가 들어가니 오랜 친구, 고향의 선 후배들과 만나는 것이 낙이기도 합니다. 매월 셋째 주 금요일에 두륜회라고 재경해남향우들이 만나서 고향이야기도 나누곤 하는데 바로 오늘 저녁이군요. "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원자 편집고문-언론인, 호남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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