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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학당 왜 해남에 세우려 하나증조부, 민비 구출해 해남현감으로
박영자 기자  |  hpakhan@h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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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8.18  13: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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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선조 묻힌 해남서 말년 보내고 싶다
21C 새로운 학문 발흥지로 학당설립 희망

1882년 6월 10일 민씨정권에 저항한 구식군대인 하급군병들과 빈민층이 궁궐을 급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개항이후 봉건체제에 대항한 대규모 민란인 임오군란이 일어난 것이다.

민란의 주축 세력인 하급 무관들과 빈민들은 창덕궁을 기습,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김보현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찾기 위해 궁궐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이때 궁정수비대 하위 군졸이던 김중현(도올 증조부)도 그 현장에 있었다. 궁궐은 불에 타고 궁녀와 내시, 왕족들의 아우성이 가득 찬 그 현장에 명성황후도 있었다. 민란을 일으킨 이들의 관심은 오직 명성황후를 찾는 것이었다. 명성황후를 찾기 위해 그들은 온 궁궐을 뒤졌고 명성황후는 이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궁녀로 위장한다. 

궁녀로 위장한 채 숨어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이 하위 군졸이었던 김중현의 눈에 들어온다. 명성황후를 발견한 김중현은 명성황후를 냅다 업고 누이라고 속이며 궁궐을 빠져나온다.

왕비를 등에 업고 그가 도착한 곳은 농포원 현재의 권농동 전씨네 집이었다. 김중현은 왕비를 내려놓자마자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일개 군졸 신분으로 국모를 등엘 업은데다 누이라고까지 했으니 그 후한이 두려웠던 것이다.  

   
 
   1992년 도울은 증조부의 묘비를 정비하면서 김중현이 해남에 내려오게 된 내력을 자세히 기록했다. 김중현이 군졸 출신이고 이전에는 유기그릇을 굽는 잡부였다는 사실도 숨김없이 기록한 이 묘비는 내용면에 있어서도 다른 묘비에서는 찾기 힘든 부분이다. (옥천면 학동리)  
 
김중현의 등에 업혀 농장에 도착한 명성황후는 이후 화개동 윤태준의 집을 거쳐 충주 장호원에서 피신생활을 한다. 한달이 넘은 피신생활 동안 명성황후는 철저히 신분을 감춘 채 위태로운 나날을 보냈고 김중현도 노심초사한 나날을 보낸다.

자신의 행동이 새롭게 들어선 대원군 세력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국모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목숨이 온전할지 장담키 어려웠다.  

명성황후가 피신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정권을 다시 잡은 대원군은 국모가 죽었음을 공식 선언하고 국상을 치른다. 자신의 국상이 선포되고 백성들이 하얀 옷을 입고 추모할 때 숨어 지내고 있던 명성황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한때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녀의 욕망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청나라를 등에 업고 재기에 성공, 대원군을 밀치고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집트의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가 언니들에게 정권을 빼앗긴 후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채 로마의 카이사르를 등에 업고 극적으로  정권을 되잡은 것과 유사했다.

명성황후는 복권이 되자마자 김중현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한다. 그러나 김중현은 쉽게 국모 앞에 나서질 못한다. 정권을 다시 잡은 그녀가 자신의 죄를 묻기 위해 찾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중현의 두려움과는 달리 명성황후는 김중현에게 "너 때문에 내가 살게 됐다"며 오빠라고까지 부르며 그를 흥양감목관에 제수한다. 

1886년 다시 종 6품에 올라 해남현감으로 부임한 김중현은 당시 해남의 세도가였던 해남윤씨 가와 가깝게 지내게 되고 그 인연으로 지금의 연동 녹우당 전시관 자리에 집을 짓고 기거한다.

그리고 김중현은 해남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충북에 있던 아버지 묘를 해남 북평면 남창 인근으로 이장한다.
해남의 새로운 세도가로 성장하기 시작한 김중현은 1889년 풍천부사, 동래수군 절도사, 1898년에는 종2품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한다.

이후에는 의정부중추원 칙임의관, 1908년에는 일등공신으로 표창을 받는 등 각종 명예도 한 몸에 받는다. 또 해남현감 이후 영암군수를 지내면서 해남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간다. 당시에는 송지면과 옥천면, 북평면이 영암에 소속된 땅이었기 때문이다.  

김중현은 해남읍 연동에 기거하면서 아들 김영학을 해남윤씨 가의 딸과 결혼시킨다. 아들인 김영학은 동복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김중현의 집안은 고향인 충북제천에서 어렵게 살았었는데 명성황후를 만난 후 전남의 신흥 세도가로 성장하게 된다.

본래 김중현은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올라가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어렵게 살았다. 그의 직업은 유기그릇을 만드는 공방에서 잡일을 돕는 잡부였다. 그러다 궁궐을 수비하는 군졸이 되었고 명성황후를 살린 인연으로 하루아침에 신분상승을 하게 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품바타령을 부르는 걸인들까지도 인간적으로 대한 결과 그의 장례식에는 품바들의 만장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현재 옥천면과 송지면에는 그를 기린 송덕비가 남아있다.

김중현의 아들인 김영학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익수와 지수이다. 큰 아들 김익수는 보성전문을 다녔고 해방 후 광주경찰서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가세가 완전 기울어져 식구 모두가 해남을 떠나고 만다.

둘째 아들 김지수는 신학문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집을 뛰쳐나와 휘문보고와 세브란스의전을 거쳐 경도제국대 의대를 졸업한다. 그가 바로 도올 김용옥의 아버지다.

도올 김용옥은 의사였던 김지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그러나 도올 아버지인 김지수는 신학문을 추구했기에 일찌감치 해남을 떠난 인물이고 이로인해 김중현으로부터 시작된 이 집안과 해남과의 인연은 막을 내린다. 

그로부터 100년 후 도올 김용옥이 고조와 증조 할아버지인 김중현의 묘를 찾아 해남에 오면서 다시 해남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해남을 찾은 도올은 고조의 묘가 있는 북평면 남창 인근과 옥천면 학동에 있는 증조부인 김중현의 묘, 옥천면에 있는 할아버지 김영학의 묘를 두루 둘러본다.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는 그의 눈에 선조들의 묘 터는 명당 중 명당에 위치해 있었다.  
김중현으로부터 4대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했지만 그래도 자손들이 다시 재기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묘 터 때문이란 게 그의 확신이다.

증조부인 김중현이 해남에서 부와 벼슬을 얻었고 다시 자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모두 해남 때문이라고 밝힌 도올은 자신의 마지막 삶을 해남에서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또 증조부인 김중현이 기거했던 녹우당도 찾았다. 당대의 학자들이 학문을 논했던 자리임도 확인했다. 

증조부로부터 시작된 해남과의 인연을 그는 이어가고 싶어 한다. 해남에 후학을 양성하고 서원을 지어 선조들의 뜻을 잇고 조상이 묻힌 해남에서 21세기 새로운 학문을 발흥시켜보고자 그는 서원을 열고 싶어 한다.

한편 해남군은 도올서원을 해남에 지어 전국의 철학가와 사상가들을 해남으로 불러오고 대학생과 청소년들의 학문의 전당으로 삼을 계획이다. 이에 군은 도올학당을 지을 터를 현재 물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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