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증언... 증언 - 송지, 북평면

각 지서마다 갈매기섬에서 학살자행
송지 노인들 갈매기섬 학살 기억 또렷

우리지역 사람 중 보도연맹에 연류돼 사망한 양민은 몇 명이나 될까. 증언을 해준 노인분들과 당시 갈매기 섬에 가보았다는 사람들은 수백명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보도연맹과 관련된 기록을 남기고 있는 해남군사에는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 사망한 숫자를 50∼60명으로 적고 있고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 소집도 해남경찰서에서만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송지와 북평 산이 등의 노인분들은 보도연맹원에 연류돼 사망한 숫자가 수백명에 이른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곳 노인분들은 6·25 직후 해남보도연맹원의 소집이 해남경찰서 한 곳에서만 이뤄지지 않았고 면 단위별 지서마다 독자적으로 이뤄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송지면 신흥리 강성칠씨(62)의 증언을 들어보자. 1950년 7월 어느날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경찰들은 다짜고짜 그의 아버지를 끌고 갔다. 그의 아버지인 강부천씨(당시 43세)는 송지면에서 이름난 지식인에다 유지급에 속했는데 경찰들이 보도연맹원이라며 끌고가 송지 지서에 수감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며칠간 송지 지서에 수감되자 강성칠씨의 둘째 누님인 강금순씨(69 영암군 거주)는 수감된 아버지를 위해 매일 식사를 지서까지 날랐다고 하는데 지서 안에는 송지 여기저기에서 끌려온 많은 사람들이 수감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철창 너머 있던 아버지가 딸을 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그 다음날 식사를 들고 지서를 찾아가 보니 지서 안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강성칠의 할머니는 송지 여기저기를 다니며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했고 사건 발생 15일째 같은 동네 사람이면서 어란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추병선씨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됐다고 한다.
어느날 어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추병선씨(작고)는 어란 앞바다에서 바라보이는 진도 청갈매기 섬이 온통 시커먼 물체로 덮어 있고 그 시커먼 물체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육안에 잡혀 섬 가까이 접근을 해봤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커먼 물체는 파리떼였고 파리떼 아래로는 시체로 추정되는 하얀 물체들이 수없이 쌓여있더라는 말을 강씨의 할머니에게 해줬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접한 강성칠씨의 할머니는 어란으로 뛰어가 아들이 청갈매기 섬으로 갔는지를 수소문했고 그때 먼 친척뻘인 어란 사람 김공배씨로부터 자신들이 배와 함께 강제 동원돼 묶여온 사람들을 경찰의 명령에 따라 배에 실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접한 강씨 가족은 자신들처럼 가족 중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가 연락이 끊긴 대죽리 2가족과 같은 마을 신흥리 1가족과 함께 청갈매기 섬으로 가 갈매기섬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갈매기 섬에는 부상당한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수많은 시체들 사이에서 들려왔고 아무데도 다친데 없이 멀쩡이 살아있는 송지 내장리 사람도 만났다고 한다. 갈매기 섬에 끌려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내장리 사람은 그곳에서 18일동안 굴과 해초만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했다고 하며 송지 사람이 집단 학살된 날이 7월16일이라고 말해 줬다고 한다. 당시는 여름철이라 청갈매기 섬은 파리떼가 하늘을 덮을 정도로 우글거렸고 시체 섞은 냄새가 너무도 진동해 서 있기가 너무도 힘들었다고 한다. 강씨 가족은 아버지가 집에서 신고 나간 고무신을 보고 시신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같이 간 대죽리 사람들도 시신을 찾았지만 신흥리 강승문씨 가족만은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시신을 찾은 이들은 갈매기 섬에 시신을 매장했고 그 후 3∼4년이 지나자 자신들의 선산으로 묘를 이장했다고 한다. 갈매기섬에서 목숨을 건진 송지 내장리 사람은 이날 배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후 부산 피난길에서 돌아온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한다.
강성칠씨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보도연맹과 관련해 사망한 사람은 산정에서 1명, 마봉 1명, 대죽 2명, 신흥리 2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북평면도 보도연맹과 관련해 희생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평 묵동 마을도 3명의 희생자가 있었는데 당시는 논에서 김을 메던 시기라 김을 메고 있던 마을 사람(당시 이장 포함)들이 영문도 모른채 경찰에 끌러갔다는 것이다.
 지서에서 볼일이 있어 잠깐 부르겠지 하고 생각한 이들은 경찰의 손에 이끌려 떠났고 이 이후로는 그들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네에 들어온 소문은 경찰에 끌려간 북평 사람들 모두 진도 갈매기섬으로 끌러가 사살되었다는 것이였다. 보도연맹과 관련한 희생자는 북평지역에서 묵동마을 뿐 아니라 북평 대부분 마을이 해당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진도 갈매기섬 집단 학살과 관련해 이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곳은 송지 어란이다. 이곳 노인분들에 의하면 6·25가 일어난 후인 7월 경 경찰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어란으로 끌고와 갈매기 섬으로 데려 간 후 집단학살했다는 것이다. 그 수가 어느정도인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인데다 한밤중에 이루어진 일이라 동네 사람들은 그저 집에서 숨죽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 노인들은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당시 경찰들은 총으로 중무장한 채 수많은 사람들을 어란으로 끌고 왔고 어란 사람들에게밖을 내다보면 무조건 사살하겠다는 말로 겁을 주었다고 한다. 또 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 줄줄이 끈으로 묶인 사람들을 각각 배에 싣게해 갈매기섬으로 끌고 가게끔 했다는 것이다.
갈매기 섬에서 사살된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는 이야기며 하얀 색으로 뒤덮인 섬이 멀리서도 보였다는 이야기, 줄줄이 묶인 사람들을 기관총으로 난사해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확인 사살을 했다는 이야기, 섬 주위 바다에도 하얀 시신이 잔뜩 떠 있었다는 이야기, 섬이 하얀색으로 변하자 그것이 보기 싫어 경찰들이 다시 섬으로 들어가 섬에 불을 질러 시신을 불태웠다는 이야기 등은 송지 어디를 가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한편 북평, 송지에서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보도연맹과 관련된 학살은 면지역에서 각각 이뤄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동안 우리지역에서는 보도연맹 집단학살은 해남경찰서에 소집된 50∼60명만을 화산 해창을 통해 갈매기섬에서 학살했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보도연맹 학살은 각 면단위별로 이뤄졌고 그 주요 학살장소가 진도 갈매기 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진도 갈매기 섬이 보도연맹원 학살 뿐아니라 경찰이 피난 길에서 돌아온 후 자행된 대대적인 살육 장소로 이용되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사진-갈매기섬에 흩어져 있는 고무신과 유골들=진도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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