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학술조사로 해남고대 해양사 정립해야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중국 낙랑과 일본, 가야와 독자적인 해상교류활동을 했고 또 이들 각 나라들이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해남 백포만과 송지 군곡리 해상세력들이 세웠던 송지 군곡리 포구도시는 그 역사적인 가치에 비해 지역사회 관심은 너무도 미미하다. 이에 반해 백포만에 대한 고고학계의 관심은 매우 크다.
서남해안은 철기시대 대외 교류 중간 기착지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주 교통로는 해상로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해상교통보다는 육지를 선호하는 정책을 펴게 되면서 해로를 중심으로 성장했던 항구들은 자연스럽게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남 화산·현산 일대에 있었던 백포만 항구였다. 백포만 항구는 철기시대 중국과 가야
철기시대 송지면 군곡리에 거대한 해상세력이 활동하고 있을 때 경상남도 김해에도 해상국가인 금관가야가 왕성한 대외 해상교류를 펼치고 있었다. 송지 군곡리는 기원전 3백년부터 기원후 4백년까지 700년 동안 존속했던 해상 도시였고 이 해상도시는 금관가야와 중국, 일본 등과 활발한 교역활동을 전개했었다. 특히 군곡리 해상세력이 가장 왕성한 대외활동을 전개했던 시
현산면과 송지면 일대는 고대사회 해상세력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이들 해상세력은 현산면과 화산면으로 이어지는 백포만을 중심으로 한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 및 일본과 해상교역활동을 펼쳤고 송지 군곡리에 자신들의 항구도시를 세웠다. 송지 군곡리 국제항구도시는 700년 간 유지되었고 현산 백포마을과 화산면 관동마을 바닷가에 위치했던 백포항은 고려시대까지 중국과 국제